[소설]여자의 사랑(58)

  • 입력 1997년 3월 4일 07시 31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13〉 그날 그들은 학교 앞까지 다시 돌아와 헤어졌다. 다른 날보다 늦어진 저녁 데이트에 대해 그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두 번 괜찮다고 말했다. 『대신 기숙사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전화 걸려고?』 『오늘은 걸지 않아요. 그렇지만 언제라도 걸고 싶을 때가 있을 거예요』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기숙사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렇지만 연결이 안 될 때가 더 많을 거야』 『왜요?』 『아까 우리가 저마다 다르게 살아온 날들과 또 그 날들에 뿌리를 내린 저마다 다른 생각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그랬지?』 『예』 『우선은 내가 없을 때도 있겠지만, 걸려와도 그 전화는 잘 바꿔주지 않아』 『군대처럼 외부 전화를 통제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바깥으로 나가는 전화는 공중전화를 이용하면 되는데, 밖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마흔 명도 넘는 학생들 모두에게 그 한 번호로 걸려오거든. 그러니까 기숙사 사무실이 있긴 하지만 일일이 그 전화를 다 알려줄 수는 없는 거야. 그러자면 전화 당번이 따로 한 사람 있어야 하니까. 또 그 전화는 사무실에서 쓰는 전화이지 학생들을 찾을 때 쓰는 전화도 아니고. 시골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도 나중에 메모를 전하거나 전화가 왔었다는 말만 겨우 전할 정도니까. 그렇지만 그것도 잊어버려 못 전할 때가 더 많고』 『그럼 번호를 알아도 걸 수 없는 전화네요』 『아마 우리 사이에선 그럴 거야. 그럴 만큼 급한 일도 사실 없을 테니까』 『그럼 내 전화번호를 알려줄게요』 길에서 그녀는 가방을 열고 수첩과 볼펜을 꺼내 자신의 전화번호와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다. 『걸면 내가 직접 받아요』 『그렇지만 이것도 자주 걸 수는 없을 거야. 우선 익숙하지 않고, 또 하나는 내가 있는 곳은 주로 기숙사인데, 사람들 북적이는 휴게실에서 전화를 거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고』 『자주 걸라는 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이제 운하씨 전화를 받고 싶을 때가 많아질 것 같아서 그래요』 그렇게 전화번호를 적어준 것만으로도 가슴 안으로 남 모르는 또 하나의 비밀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글: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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