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각 저생각]이동신/설레는「주례선생」

  • 입력 1997년 2월 24일 20시 22분


봄이 오면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교수로 임명된지 얼마되지 않은 30대후반 때의 일이다. 느닷없이 한 학생이 주례를 부탁해왔다. 예기치 않던 일에 순간 당황하면서 생각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 아마 그 순간에 내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우선 나자신은 아직 젊다고 생각해왔는데 벌써 주례를 서야 할 만큼 늙었나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고, 또 예식장에 가득 모였을 어른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해야 할 말이 생각날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귀중한 일생의 첫 주례부탁을 거절해버렸다. 그 이후에는 또 주례를 부탁할까봐 겁이 나 아예 사은회자리에서 주례폐업을 선언했다.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아마 나의 절박했던 심정을 눈치채지는 못했으리라. 그 이후 본의아니게 몇번 주례를 섰다. 그 대상은 대개 내 일을 돕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 학생들이지만 막상 주례를 서고 보니 생각보다 재미가 괜찮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한쌍의 신혼부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 즐겁고, 거기다 졸업한 뒤면 보기 힘든 여러 제자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 것도 즐겁다. 또 주례사를 열심히 듣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례선생이라고 융숭히 대접해주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4년동안 학문을 배우고 드디어 인생이라는 험난한 항해를 떠난다는데 모른체하는 것은 선생의 도리가 아니다. 또 국회의원도 주례를 안서면 떨어진다는데 교수도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주례를 서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새봄에는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명언과 좋은 성경구절이라도 찾아내서 주례개업준비를 해야겠다. 이동신<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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