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43)

  • 입력 1997년 2월 15일 20시 19분


독립군 김운하〈14〉 그녀의 눈이 반짝 위로 떠졌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왠지 그 안에 자기가 짐작 못할 또다른 사연 같은 게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요』 『아무 일 없었나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 나서, 그 말이 조금은 다른 뜻으로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해 아침에 돌아와서 말예요, 하고 덧붙였다. 『왜 없었겠어요. 아침에도 밤에도…』 독립군은 눈을 아래로 깔고 낮게 대답했다. 『참 이상했어요. 여자와 한 방에 누워 있었는데 그게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을 정도였어요. 여자는 이야기를 하다 울고, 이야기를 하다 울고 그랬고요. 그러다 여자가 그랬어요. 자기를 다시 안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그 사람을 잊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죠. 어쩌면 그 여자로선 자학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라요.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이미 지울 수 없는 기억을 훼손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나로서는 그걸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후론 안 찾아왔나요?』 『예. 어쩌면 찾아올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게 그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어요. 내 몸으로 그에 대한 여자의 기억을 훼손하며, 또 그러는 동안 울고 있는 여자를 보며 여자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그랬군요』 이번엔 그녀가 눈을 아래로 깔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새벽에 일어나니 여자는 이미 떠났더군요. 그게 연애 한 번 없이 여자하고 자본 기억의 전부입니다. 단지 어떤 안타까움만으로』 『그래도 가끔 생각나지 않을까요?』 『나 말입니까, 아니면 여자 말입니까?』 『독립군 말이에요』 그렇지만 안타까움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거지요. 일테면 그때 여자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나 의미같은 것들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나로선 사랑의 어떤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그 친구에 대해서겠지요. 그런 기억은 오래 갈 수도 있는 거니까』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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