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35)

  • 입력 1997년 2월 5일 20시 13분


독립군 김운하〈6〉 마음 속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그렇게 물으면 정색을 하고 감추어야 할 말인데도 그녀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너무 담담하게 말했다. 나,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그 말에 친구는 이건 정말 놀랄 일이야, 하는 얼굴을 했다. 어쩌면 그 말보다 그녀의 태도에 대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너무 혼자로만 지냈다. 지난 봄, 아저씨를 보내고 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아저씨를 잊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이제 그 기억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 아저씨에 대한 기억을 그녀는 그녀 마음의 가장 슬픈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녀 책상의 한 서랍 속이 그렇듯 그녀 마음 속의 슬픈 서랍 속에도 아저씨의 이름과 아저씨가 쓴 기사와 그것을 오리던 한 소녀와 파리에서 아저씨가 보냈던 편지와 세 번의 짧은 만남이 들어 있었다.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누구의 마음 속에나 슬픈 일들은 제일 깊숙한 서랍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다. 이제 그것을 다른 서랍 속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때 열일곱 살이었던 한 여자 아이가 스물두 살의 한 여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밝고 쾌활해지고 싶었다. 청산리 독립군을 만나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씩 그녀의 마음이 바뀌어갈 때 독립군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둘 사이에 아직 어떤 진전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변화는 외모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학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웬일이니?』 친구들도 다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던 친구들조차 그랬다. 『왜? 나는 이렇게 입으면 안돼?』 『안될 것까지야 있겠니? 무슨 변환가 싶어 놀라워 하는 얘기지』 한 번 그렇게 입기 시작한 치마는 그녀의 허벅지 중간쯤의 맨살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릎과 허리의 위치로 따진다면 그녀의 치마는 무릎보다는 오히려 허리 쪽으로 더 올라가 있는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물론 그런 변화에 대해 스스로도 놀랍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리에서든 학교에서든 사람들의 시선이 때로는 곤혹스럽고도 은밀한 모습으로 자신의 치마 끝에 와 멈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시선들 사이로 그녀는 여전히 혼자 돌 틈과 수초 사이를 헤엄치듯 온몸의 비늘을 반짝이며 학교와 집 사이를 오고 갔다.< 글 : 이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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