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48)

  • 입력 1996년 12월 20일 19시 33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22〉 애리가 새어머니 집에 다니러 간 지 이틀이 지났다. 하루종일 비디오를 보고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 나는 밖이 어두워진 것을 알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냉장고 안에는 애리가 만들어서 넣어둔 음식이 여러 가지 있었다. 그러나 입안이 깔깔해서 밥 먹을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대신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는다.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나와서 집안의 모든 커튼을 다 닫은 다음 맥주를 마시고 자는 것. 그것은 내 스스로의 처방에 의한 나만의 심리치료 요법이다. 나는 먼저 커튼을 내리고 목욕을 했다. 그리고 술을 마신다. 맥주를 두 깡통째 마시는데도 전혀 취기가 오지 않는다. 음악을 틀까 하다가 그만둔다. 음악 틀어놓고 술 마시는 일은 작위적이라서 간지럽다. 그러다가는 간지러움에 도취한 나머지 탁자 위에 뺨을 대고 울어야 할지도 모른다. 세번째의 깡통을 꺼내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현석일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헤아리다가 벨소리가 열 번을 넘어서자 그제서야 송화기를 든다. 내가 전혀 안 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 절박함도 없이 나를 찾는 사람은 상대해주지 않으리라는 거만한 작정이 드는 걸 보면. 『저녁 먹었어?』 다정함처럼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현석이 다정해서 나는 불만이다. 『안 먹었어』 『같이 먹자, 여기 신촌인데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약속 있어서 곧 나가야 돼』 현석은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라면서 옷을 단단히 입고 나가라고 이르고는 전화를 끊는다. 처음에 현석은 이렇지 않았다. 여자에게 다정하게 구는 일 따위는 유치한 낭만파나 하는 짓이라는 듯이 사뭇 냉랭했다. 이른바 매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얼마나 대범한 척했는지 모른다. 자기가 앞서서 문을 열고 나갈 경우에도 내가 나갈 때까지 그 문을 붙잡아주는 법이 절대 없었다. 나는 현석을 믿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가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몇 번이나 코를 깰 뻔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안은 현석도 그렇게 시니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를 자기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은 다음부터 이미 나는 그에게 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고 또 다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놓쳐버려야만 한다.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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