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34)

  • 입력 1996년 12월 5일 20시 12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8〉 나는 결혼을 서두르자는 현석의 말에 차갑게 대꾸한다. 『그럴 마음 없어.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등떼밀려 결혼하기도 싫고, 결혼한 후의 일들도 자신없어. 난 대충 살고 싶어. 시련을 극복하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삶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고 그럴 의지도 없다구』 마침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으므로 우리의 얘기는 거기에서 끊어진다. 『우선 먹자. 배가 부르면 네 생각도 좀 낙관적이 될 거야』 현석이 내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조금 웃어 보인다. 유리잔의 굽을 잡고서 잔속에 채워지는 투명한 빛을 쳐다보면서 나도 웃는다. 사실 배가 고팠던 참이었다. 포도주는 달콤하고 향기롭다. 잔을 내려놓고 포크를 집으며 나는 무심코 창쪽을 한번 쳐다본다. 어둠이 깊숙이 밀려와서 커다란 창은 거울이 되어 있다. 그 어둠의 거울 속에 한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들어 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남자의 옆모습은 막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하는데, 여자는 혼자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어둠 속에 떠 있는 여자의 얼굴은 황폐해 보인다. 저 둘이 저렇게 한 폭에 함께 담겨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고개를 돌려서 접시 위로 시선을 떨구며 나는 입술을 깨문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나는 누구와도 합해지지 않는다. 늘 혼자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려고 애쓴다. 어쩌면 내 자의식은 모두 타인을 의식한 건지도 모른다. 타인을 통해서만 자기를 증명하고 존재를 찾는다는 건 얼마나 거짓된 삶인가. 사랑받기 위해서 상대방 감정의 향방에만 마음을 쓰고 내 감정의 진위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그동안 내가 해온 사랑이었다. 나는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내게 오는 남자들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사랑이라고? 정말 그런 게 있었다면… 나는 불현듯 현석을 건너다본다. 언제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그의 눈이 내게 마주쳐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가슴 깊이의 박동 속에서 뜨거운 소리가 맹렬하게 목구멍으로 솟구쳐오른다. 사랑해. 사랑해.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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