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한국 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은 원래 네 것이었다. 네가 8년간 일본에서 뛰는 동안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었을 뿐이지.
올해 타격감이 안 좋아 맘고생이 심했을 거다. 그 심정 내가 잘 안다. 그래도 이렇게 거뜬히 이겨낼 줄 알았다. 내가 10년 넘게 봐 온 이승엽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보란 듯이 일어나는 선수니까.
한때 너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적이 있었다. 나도 잘나가는 스타였지만 네가 프로에 입단한 뒤로는 항상 네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1998시즌이 끝나고 내가 정든 삼성 유니폼을 벗고 해태로 트레이드된 것도 너 때문이었다. 같은 왼손 타자에 같은 포지션. 그런 경우라면 2명이 한 팀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결국 2인자인 내가 밀렸지. 당시엔 충격이 너무 컸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래도 널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덩치도 작고, 투수로 입단해 타자 경력도 오래되지 않았지만 펑펑 홈런을 때려내는 네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때 이미 난 깨달았다. 너는 내 라이벌이 될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2002년 다시 삼성으로 돌아온 뒤 또 한 번 네게 놀랐다. 그때까지 난 누구보다 야구를 좋아한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니더라. 야구를 가장 사랑하는 선수는 바로 너였다. 순한 얼굴이었지만 10번 잘 치다가 한 번 못 쳐도 너는 확 돌았지. 텅 빈 야구장에서 새벽 두세 시까지 방망이를 돌리던 네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넌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노력했고, 그래서 꼭 이겨냈다.
내 야구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너일 거다. 나이 어린 선수에게 뭔가를 배워야겠다고 느낀 건 네가 처음이었다. 2002년 스프링캠프 때 네가 타격 폼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 내가 “너 바보냐”라고 했던 거 기억할지 모르겠다. 1999년 54개, 2000년 36개, 2001년 39개 홈런을 쳤는데 뭐가 아쉬워서 타격 폼을 바꾸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중에 후회하니까 절대 바꾸지 말라”고 하니까 너는 그냥 씩 웃고 말았지. 그런데 넌 2002년 47홈런에 이어 2003년에는 한 시즌 아시아 신기록인 56호를 쏘아 올렸지.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았을 때 난 너를 떠올렸다. 널 생각하면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었다. 각종 타격 기록을 경신한 뒤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네 덕분이었다. 나는 네 선배고, 항상 너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너와 함께 선수 생활을 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너를 인정하고, 너의 노력을 받아들이는 순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승엽아, 지금 이 순간도 353호, 354호 홈런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을 승엽아. 앞으로 네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400홈런, 500홈런도 쳐 줬으면 좋겠다. 오래 선수 생활을 하면서 팬들에게 큰 기쁨을 줬으면 좋겠다. 내게 넌 영원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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