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하이원 국제 트라이애슬론 도전

  • 입력 2009년 6월 17일 08시 33분


부표에 매달린 물개 “철인 살려줘”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고 기어이 보고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 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수평선으로 난 오솔길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난 해당화

그 붉은 꽃잎들의 눈물이었다.

정호승 [첫 키스에 대하여]

기대 반, 두려움 반. 설렘, 긴장. 떨리는 심장으로 미지의 문을 두드리던, 딱 그때의 느낌이었다. 13일 밤, 강원도 삼척. 스포츠동아와 동아일보, 대한트라이애슬론연맹이 주최하고 하이원 리조트가 협찬하는 2009하이원 국제트라이애슬론이 막을 올리기 정확히 12시간 전이었다. 관계자들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얼마나 준비하셨어요?”, “마음의 준비만….” 트라이애슬론대표팀 안경훈(41)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초심자들이 대회에 나서려면 최소한 6개월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

“수영은 할 줄 아세요?”, “네. 그냥 실내수영장에서 조금….” 해법이 없는 방정식이었다. “내일 일찍 일어나셔야 하니까 일단, 푹 쉬세요.”

어둠에 물든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실체는 감추고 있었지만,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비만 물개의 출현

14일 오전 6시, 삼척해수욕장. 600여명 가량의 건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영-사이클-마라톤의 순서로 진행되는 트라이애슬론은 대회 성격에 따라 코스가 나뉜다. 올림픽 코스는 수영1.5km·사이클40km·마라톤10km. 소위 철인(Ironman) 칭호는 킹(king)코스를 17시간 이내에 완주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킹 코스는 수영3.8km·사이클180.2km·마라톤 42.195km. 이번 대회는 수영3km·사이클80km·마라톤20km의 O2코스다.

오전6시50분. 하얀 백사장위로 검은색 웨트슈트(wet suit)를 입은 참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기가 흐르는, 검고 매끈한 몸매가 꼭 물개를 연상시켰다. ‘비만 물개’도 슬쩍 무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1998하와이트라이애슬론에서는 150kg의 여성이 출전한 적이 있었다. 사이클까지는 근근이 버텼지만, 결국 중도포기. 1995세계트라이애슬론에서는 다엘 헤일리라는 풋볼선수(135kg)가 참가했는데, 완주에는 성공했지만 기록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트라이애슬론은 유산소성 운동들의 결집체다. 속근 보다 지근 중심이기 때문에 우락부락한 체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영하면 피부도 쓸린다고요?”

해녀 복을 연상시키는 웨트슈트의 가장 큰 역할은 보온. 적절한 부력까지 있어, 수영을 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수온이 14도 이하일 경우에는 슈트착용이 의무. 엘리트 선수의 경우, 20도 이상에서는 슈트를 입을 수 없다.

“글리더는 바르셨어요? 피부가 다 까질 텐데.” 바로 옆에 선 안산철인클럽의 김현정(37)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마디. 바다와 싸우는 동안, 몸과 슈트 사이에는 끊임없이 마찰이 생긴다.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목덜미와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에 글리더를 바른다. 출발 5분을 앞두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제가 뭐, 바다 속에 오래 있겠어요?”하고 넘겼지만, 불안감은 더 커졌다.

○제발 그만두고 싶은, 날카로운 첫 키스

오전7시5분. 함성과 함께 첨벙. 힘들면 바로 부표를 잡을 생각에 부표 쪽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바다수영에는 레인이 없기에 신체접촉이 불가피하다. 부표 근처에서 헤엄쳐야 반환점까지 최단거리가 나오기 때문에 이곳은 가장 몸싸움이 치열하다.

헉헉. 막힌 숨을 한 번 고르려는 찰나, 강력한 스트로크를 구사하던 누군가의 팔꿈치가 이마를 때렸다. 당황할 겨를도 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의 중단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 하지만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 짠물로 위세척만 했다.

‘난생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였다. 희디흰 목덜미를 드러내고 끊임없이 달려오던 삼각파도였다. 보지 않으려다 보지 않으려고 기어이 보고만 수평선이었다. 파도를 차고 오르는 갈매기 떼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수평선 너머로 넘어지던 순간의 순간이었다.’

말로만 듣던 카오스. 첫 키스와의 공통점은 가쁜 호흡뿐이었다.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부표를 움켜쥐었다. 뿌연 고글 너머로 해안선 근처에서 손짓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넌, 할 만큼 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해변 쪽으로 역영.

○“100m는 갔다고요!”

파도는 수심이 얕은 곳에서 물보라로 변하며 해변을 때린다. 그리고 다시금 대양 쪽으로 빠진다. 대표팀 안경훈 감독은 “해변에서 100m 안쪽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공존한다”고 했다. 팔을 아무리 내저어도 제자리. 하릴없이 부표를 타고 간신히 이동했다.

물에서 나오는 순간,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네요. 50여m지점에서 돌아왔습니다.”, “엥? 50m라니! 100m는 갔다고요!” 바닷물을 게우는 동안, 안 감독이 슈트를 벗겼다.

“고글의 기를 받았으면 절반은 갔을 텐데…. 제가 빌려드린 고글이 이창연(22·서울시체육회) 선수의 것이거든요.” 서울시체육회 장유정(29) 코치가 안타까운 듯 바라봤다. 이창연은 5월 경남통영월드챔피언십시리즈 수영1위. 적토마의 주인은 따로 있는 법이다. 철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고글의 두 눈은 흐릿하게 젖어있었다.

○온몸이 종합병원, 자원봉사자로 급변신

이번 대회는 특히, 사이클 코스가 악명이 높았다. 안산철인클럽의 안재연(40)씨는 “40km지점부터는 거의 오르막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삼척해수욕장에서 시내까지의 구불구불 해안도로 만으로도 충분히 공포감을 느낄만했다.

공기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좁은 어깨 폭과 수평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페달을 돌리는 다리 뿐 아니라 허리와 어깨 부근에도 통증이 왔다. 선수에서 자원봉사자로 잠시 변신. 동호인들이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잠시 피로감을 날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철인은 마음까지도 철든 사람

태백선수촌에서 하이원골프장까지, 20km 마라톤. 이것만은 완주가 목표였다. 철인들은 마라톤을 출발하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호소한다. 근전환의 문제 때문. 사이클에서는 ‘주로’ 대퇴사두근을 사용하는데 반해, 마라톤은 대퇴이두근을 이용한다. 마라톤 첫 1km에서는 근육의 적응문제 때문에 통증이 생긴다.

마라톤 코스에는 내리막이 많았다. 자원봉사를 하고 온지라, 다행히 근전환의 고통은 없었지만 대신 무릎 통증이 뒤따랐다. 내리막이라고 항상 좋은 것이 아니다. 이미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 관절에 더 많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 2km 마다 설치된 보급소의 바나나와 초코바 만이 위안이었다.

비경을 뚫고 저 멀리에 하이원골프장이 보였다. 마지막 오르막. 박수소리에 혼미했던 정신이 깨어났다. “저, 어디소속이세요?” 구미철인클럽 박대규 씨(28)가 최후의 500m를 함께 달렸다. “저는 스포츠동아요.”

박 씨는 “신체의 극한 속에서 자기철학이 생긴다”면서 “자신을 이겨본 사람만이 남도 배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철인은 마음까지도 철든 사람.

먼저 영광의 메달을 목에 건 동호인들. 하지만 그들은 굵은 빗방울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과의 사투에서 무사 귀환한 동료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기 위한 기다림이었다.

삼척-태백-영월-정선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ㅣ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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