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미국 미시간주의 한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는 작은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로운 치료법인 에크모(인공심폐보조장치)와 기존 인공호흡기 중 치료 결과가 좋은 쪽을 평가해 항아리에 흰 공이나 검은 공을 하나씩 담을 수 있게 했다. 다음 신생아의 치료법은 먼저 치료를 받은 신생아의 회복 상황에 따라 결정됐다. 의료진 윗선이 일방적으로 환자의 치료법을 정하지 않고 예후에 따라 다음 환자에게 같은 치료법을 진행한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서울대 10개 만들기’(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 방안)의 취지는 9개 거점국립대가 각자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더 깊게 성장시켜 한국 고등교육 전체를 두껍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거점국립대 3곳을 먼저 선정해 핀셋 지원하고 나머지는 단계적으로 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외형상으로는 모두에게 기회가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차로 인해 격차가 점점 벌어질 수 있다.
대학의 성취는 누적된다. 1년 일찍 지원을 받고 교수를 채용하면 연구가 더 빨리 진척될 수 있다. 이듬해 뒤늦게 선정된 대학은 이미 1년의 성과를 쌓은 대학과 같은 평가지표에서 경쟁해야 한다. 1년이라는 차이는 시간차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매슈 효과’라고 부른다. 앞선 자리로 자원이 더 빠르게 흘러가 누적의 흐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첫해 선정 기준이다. 교육부가 내건 핵심 기준은 ‘준비된 대학’이다. 지역 산업과의 연계성,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의지, 기업과의 산학 협력 준비 등이 주요 항목이다. 이는 대학의 학문적 역량이 아니라 대학이 자리 잡은 지역의 산업 기반을 반영한다는 뜻이다. 대기업이 밀집한 지역의 대학은 협력 상대를 쉽게 확보하겠지만, 산업 기반이 취약한 지역 대학은 협약 상대 자체를 찾기 어렵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 수혜자를 가릴 기준을 놓고는 기존의 지역 불균형을 다시 끌어들인 셈이다. 탈락한 대학에는 선정된 대학 지원금의 3분의 1 수준인 300억 원만 지원돼 다시 격차가 발생하는 구조다.
‘미시간 항아리’의 핵심은 실제 치료법의 성과가 다음 치료 방향을 결정한다는 데 있다. 거점국립대에도 이를 적용하면 9곳 모두에 초기 지원금을 균등하게 배분한 뒤 매년 성과를 반영해 추가 배분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산업적 기반이 취약한 곳의 현실적 사정을 반영해 수치보다는 혁신의 속도와 성장도에 무게를 둬야 한다. 그래야 평가가 지역적 산업 기반의 불균형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대학들의 성장 잠재력을 끌어내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좋은 정책은 참여자 모두를 같은 출발선에 세우고, 그 위에서 혁신의 속도 등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국 고등교육 발전을 위해선 9개 거점국립대가 모두 함께 출발해야 한다. 지원 대학을 선정하는 것은 행정의 일이지만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성장 잠재력을 가진 대학을 발굴하는 것은 정책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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