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값 뛰는데 무료급식 단가는 김밥 한줄 값… 곳곳 “이젠 한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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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지원-후원이 물가 못따라가
서울-부산 등 경로식당 단가 동결
이용자 수 줄이고 식단 축소까지
물가연동 지원법안 국회 발묶여

19일 오전 10시 40분경 서울 영등포구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 어르신 30여 명이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점심을 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이들이 받아 간 5구 식판 중 채워진 칸은 떡국과 배추김치 등 두 칸뿐. 전날 한 후원 업체가 소비기한이 임박한 떡을 기부해 겨우 한 끼를 넘길 수 있었다. 급식소 냉장고 안에는 지난해 사둔 강낭콩과 김치만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박경옥 토마스의 집 총무는 “장 보러 갈 때마다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물가가 무섭게 올라서 하루하루 마음을 졸인다”고 말했다.

1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에서 찍은 식판 사진. 이날 점심은 전날 급하게 기부받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떡으로 만든 떡국과 김치뿐이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강동구 무료급식소 ‘행복한세상복지센터’도 요즘 고기나 달걀 반찬은 거의 내지 못하고 있다. 추가 배식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센터 관계자는 “식용유와 김치 등 대체하기 어려운 식재료마저 값이 2배로 뛰었다”라며 “특히 올 1월 이후로 식판이 많이 휑해졌다”고 했다.

● 물가 못 따라가는 무료급식 지원

지난달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식료품 가격에 무료 급식소와 푸드뱅크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지원이나 민간 후원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탓에 이용자 수를 제한하거나 식단을 축소하며 버티고 있지만, 이마저 한계에 다다랐다는 호소가 곳곳에서 나온다.

10일 오전 11시경 서울 영등포구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에서 노인들이 떡국과 김치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하루 300여 명이 찾는 이곳은 식료품 물가가 급등하며 식단 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광주에서 34년째 무료급식을 해온 ‘사랑의 식당’은 몰리는 이용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최근 들어 기초생활 수급 증명서를 확인하고 밥을 나눠주고 있다. 광주시가 관련 예산을 지난해 47억 원에서 올해 48억 원으로 늘렸지만, 하루 무료급식 인원은 4166명에서 4019명으로 줄었다. 김정숙 사랑의 식당 자원봉사팀장은 “고추 한 봉지가 1년 새 2000원에서 9000원으로 올랐다. 밥을 못 드린다는 말씀에 급식소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할머니도 있었다”고 했다.

19일 17개 시도에 따르면 올해 저소득층 어르신 무료급식 사업 ‘경로식당’의 전국 평균 지원단가는 4070.6원이었다.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김밥 가격(3323원)보다 조금 높았다. 특히 서울과 광주, 경북(이상 4000원), 부산(3500원) 등 12개 시도는 경로식당 단가를 전년 수준으로 동결했다. 인천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당시 한시적으로 단가를 4000원으로 올렸으나 지난해부터 3500원으로 다시 낮췄다. 2년 새 식품 생활 물가가 12.4%, 신선식품 물가가 24.1% 각각 오른 걸 고려하면 체감 지원단가는 삭감된 셈이다.

이는 2005년 경로식당 사업에 국비 지원이 끊겨 각 시도의 재정에 의존하게 된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3월 경로식당 지원 단가도 아동 급식처럼 물가와 연동하는 노인복지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주성 송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령 인구 비율이 높고 재정 여건이 어려운 지역일수록 부실 급식에 따른 영양 악화는 의료비 등 더 큰 지출로 이어질 수 있다”며 “물가 상승률에 맞게 급식 단가를 조정하는 법적 근거를 둬야 한다”고 제언했다.

● 푸드뱅크 이용자 늘었는데 식재료는 6% 줄어

저소득층에게 식재료를 나눠주는 푸드뱅크와 푸드마켓에선 지역에 따라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1인당 지원 품목이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사회복지협의회 푸드뱅크사업단에 따르면 지난해 푸드뱅크 모집액은 2022년 대비 3.3% 늘었지만 모집한 식재료의 수량은 6.1% 줄었다. 물가가 급등한 탓에 같은 후원액으로 갖출 수 있는 식재료 양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서울의 한 푸드마켓. 고추장이 쌓여 있는 진열대 앞에 ‘1개씩 2품목’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이 푸드마켓에서는 최근
 고물가 여파로 일부 품목 구매 수량을 제한하는 등 조치에 나섰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5일 오후 서울의 한 푸드마켓. 고추장이 쌓여 있는 진열대 앞에 ‘1개씩 2품목’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이 푸드마켓에서는 최근 고물가 여파로 일부 품목 구매 수량을 제한하는 등 조치에 나섰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5일 오후 2시경 서울의 한 푸드마켓에는 1kg짜리 설탕이 진열돼 있고, 그 아래 ‘1인당 2봉지씩 가져갈 수 있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지난해만 해도 이곳에선 1kg 설탕을 5봉지씩 가져갈 수 있었다.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고물가 여파에 설탕이나 고추장, 과일 등 물가에 민감한 품목들이 모두 ‘구매 제한’이 더 엄격해진 셈이다.

고물가와 더불어 저소득층이 증가해 실제 복지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종로푸드뱅크 기준 올해 이용자 수는 1300명으로, 2년 전 1000명 대비 약 30% 증가했다. 신규 이용 신청자 역시 2022년 368명에서 지난해 609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늘어남에 따라 푸드뱅크 사용 기한에도 제한이 생겼다. 이날 푸드뱅크에서 만난 한 90대 노인은 “다음 달 (푸드마켓) 카드를 반납하고 나면 그다음엔 2년을 기다리라고 한다”라며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 “미안해서 못 팔겠다” 상인도 한숨

32년 5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한 과일 가격에 소비자들의 발길이 뚝 끊기자 상인들은 밤늦게까지 가게 문을 열며 매출 회복 총력에 나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신선식품지수 ‘신선과실’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41.2% 상승했다.

16일 오후 10시경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전태산 씨(65)가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다. 32년 5개월 만에 최고를 기록한 과일 가격에 소비자의 발길이 끊기자 상인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15일 오후 10시경 공식 영업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난 가운데도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한 과일가게가 외로이 시장을 지키고 있었다. 30년간 이곳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한 전태산 씨(65)는 “매출이 반 이상 줄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밤늦게까지 가게를 열어 놓고 있다”며 “과일값이 너무 올라 손님한테 미안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도매시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명절 대목’이 한참 지나갔는데도 과일 가격이 더 올라 손님이 줄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오전 10시경 송파구 가락시장 과일가게는 손님이 없어 불이 반쯤 꺼진 채 한산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10년째 과일가게를 운영 중인 과일 도매상인 김모 씨(52)는 “지난해 10kg에 4만 원 하던 사과 가격이 올해는 8만 원을 훌쩍 넘겼다”고 했다.

싼 가격을 찾아 도매시장에 온 소비자들도 예상과 달리 턱없이 높은 액수에 한숨지었다. 이날 이곳을 찾은 김옥라 씨(79)는 “집 앞 가게는 도저히 과일을 살 수가 없어 도매시장에 왔는데도 여전히 사기 두려운 수준”이라고 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춘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무료급식#푸드뱅크#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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