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前 광주는 고립무원… 폭도가 아니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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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5·18’이란…]<2> ‘오월의 어머니’ 안성례 씨
당시 간호사로 다친 시민들 치료
2001년 오월여성동지회 만들어… 희생자 어머니들의 아픔 치유

14일 광주 서구 상무지구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만난 안성례 씨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희생자 어머니 등 여성들도 많은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4일 광주 서구 상무지구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만난 안성례 씨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희생자 어머니 등 여성들도 많은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14일 오전 10시 광주 서구 상무지구 광주트라우마센터 13층 강당.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 20여 명이 합창 연습에 열중했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 유가족, 구속자, 부상자들로, 2015년 소나무 합창단을 만들어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마음의 안식을 찾고 있다.

명지원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은 “5·18 피해자들은 1980년 5월 당시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후 신군부의 감시와 탄압으로 피멍이 들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올해는 5·18 왜곡과 폄훼로 그 상처가 더욱 깊어졌다”고 말했다.

합창단원인 안성례 씨(82)는 5·18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민주투사다. 명 센터장은 그의 딸이다.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현재 간호과장)이었던 안 씨가 겪은 5·18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1980년 5월 21일부터 1주일 동안 기독병원 응급실은 야전병원을 연상케 했다. 계엄군에 의해 총상을 입거나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대검에 찔린 시민들이 실려 왔다. 안 씨가 가장 가슴 아파했던 일은 헌혈을 하고 돌아가던 여고생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시신으로 실려 왔을 때다. 안 씨는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고 했다.

안 씨는 1980년 5·18민주항쟁구속자회장을 맡아 오월 진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남편인 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2000년 작고)는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란 성명을 통해 유신독재를 비판한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임됐다. 명 교수는 5·18 때 시민수습대책위원을 맡았다가 내란죄로 몰려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5월 진상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안 씨는 5·18 이후 거리의 투사로 나섰다. 경찰에 수차례 연행됐지만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관계자가 병원 당직실로 찾아와 “시위를 계속하면 병원에서 근무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해도 그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1990년 광주기독병원에서 퇴직한 안 씨는 이듬해 광주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5·18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의회 차원에서 진상 규명에 앞장섰다. 3선 시의원을 지낸 뒤 5월 단체로 다시 돌아왔다.

안 씨는 오월어머니회 전신인 오월여성동지회를 2001년 결성했다.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오월 어머니들이 전국을 돌며 진실을 알리고 광주로 돌아오면 마땅히 쉴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월어머니회 회원은 60여 명이다.

“5·18 당시 광주는 외로웠어요. 아직도 5·18 희생자를 간첩, 폭도라고 부르며 상처를 헤집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날의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5·18민주화운동이 헌법 전문에 실리는 날이 꼭 왔으면 해요.”

5·18 진상 규명과 희생자, 유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반평생을 바쳐온 안 씨의 바람은 민주, 인권, 희생의 5·18 정신이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이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민주화운동#안성례#오월여성동지회#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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