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명인열전]“오름에 있는 생명이 오름의 주인… 경청하는 자세 가져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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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김홍구 제주오름보전연구회 대표

김홍구 제주오름보전연구회 대표는 오름에 일생을 바쳤다고 할 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오름 368개를 표시한 오름 지도를 처음 제작했고, 오름 생태 훼손을 막기 위해 야자수 매트를 만들기도 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김홍구 제주오름보전연구회 대표는 오름에 일생을 바쳤다고 할 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오름 368개를 표시한 오름 지도를 처음 제작했고, 오름 생태 훼손을 막기 위해 야자수 매트를 만들기도 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섬이 만들어진 아주 오랜 옛날 ‘설문대할망’(제주창조신화의 주인공)은 제주 사람들에게 “명주 속옷을 만들어주면 섬과 육지를 이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제주 사람들은 온 섬을 뒤지며 열심히 명주를 모았다. 거대여신인 설문대할망의 명주 속옷을 만들려면 100동이 필요했다. 그 사이 설문대할망은 흙을 퍼 날라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모아도 명주는 99동, 1동(길이 1km 정도)이 모자랐다.

결국 섬과 육지가 이어지지 않았고 설문대할망의 터진 앞치마에서 새어나온 흙은 ‘오름’이 됐다. 한라산이 제주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면 오름은 자식 같은 존재다. 용암이 바다 위로 솟구쳐 제주를 만든 건 한라산이지만, 그 위에 곶자왈(용암이 흐른 암괴지대에 형성된 자연림)과 용암계곡을 만들면서 땅에 생명의 기운을 심고 키운 것은 오름이다. 오름은 오르다의 명사형이지만 제주에서는 악(岳), 봉(峰), 뫼(山)를 이른다. 이전에 기생화산으로 표기했으나 지금은 소화산체, 독립화산체로 불린다. 한라산 백록담을 제외한 화산체는 368개에 이른다. 화산체가 많다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260여 개)보다 많다.

○ 오름에 묻은 삶

24일 오후 만난 김홍구 제주오름보전연구회 대표(56)는 오름이 삶 자체인 인물이다. 1년에 오름 150회를 오른다. 거리로 따지면 1500km 이상이다.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름을 다녔는데 30년 동안 오른 횟수만 4500회에 이를 정도다. 단지 오름에 오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를 때마다 오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4만 컷 이상의 오름 자료 사진을 보유하고 있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가 고향인 김 대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를 따라 서울 북한산 자락인 우이동으로 이사를 했다. 북한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대학까지 다녔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제주로 끌었다. 방학 때면 혼자서라도 제주를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기어이 성사시켰다. 어린 시절 오름에서 나무땔감을 하고, 송충이를 잡으며 야생열매를 따먹었던 기억과 추억이 강렬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제주로 내려온 뒤 회사 일을 마치면 미친 듯이 오름을 다녔다.

“오름 정상에 서서 화산이 터지는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엄청난 장관이 아닙니까. 곳곳에서 터져 나온 마그마 향연이 오늘의 제주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초,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오름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주 사람은 오름 닮은 초가에서 태어나 오름에서 생활하다 결국엔 오름 닮은 무덤이 있는 오름에 묻힌다고 할 만큼 제주 사람의 삶을 품고 있습니다.”

오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위해 368개 오름을 모두 오른 뒤 오름지도를 처음으로 제작했다. 당시 시중에서 사용하는 일반 지도에는 커다란 오름 몇 개 정도 표시한 것이 전부였다. 일부는 위치가 틀리는 등 정확도가 떨어졌다. 김 대표는 길이 없는 오름을 찾아다니며 해발, 표고, 비고 등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 지도를 만들었다. 홍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컴퓨터 회사에 근무한 터여서 컴퓨터 작업이 수월했기에 지도 제작이 가능했다. 최근 이 지도를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 정확도를 훨씬 높였다. 상업용으로 쓰지 않고 기록, 자료용으로만 보관할 생각이다.

요즘 오름은 물론이고 국내 다양한 탐방로에 야자수 열매로 만든 매트가 깔려 있는데, 이 매트를 특허출원한 주인공이 김 대표다. 오름 환경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타이어 매트를 걷어내려고 아이디어를 냈고 실제 제조에도 참여했다. 괌, 인도네시아 등지를 다니며 연구를 한 끝에 야자수 매트를 출시했다. 야자수 매트가 생태계 훼손을 다소나마 막는 수단이 됐지만 오름을 사업에 이용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제주에서 관련 사업을 하지 않고 있다. 야자수 매트 외에도 암반에 식물이 자라는 기술을 개발해 태국, 일본 등지에서 수익을 내고 있다.

○ 오름에 있는 생명이 주인


오름은 저마다 특색이 있다. 밑에서는 밋밋한 포물선으로 보이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그제야 오름의 진면목이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항아리처럼 입을 쩍 벌린 다랑쉬, 여인네 옷고름처럼 살랑살랑대는 용눈이, 눈부신 억새물결이 넘치는 따라비 등은 다른 개성을 뽐낸다.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깃든 물장오리, 숲이 울창한 물영아리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될 만큼 자연생태가 빼어나다.

화산 폭발 순간을 보여주며 ‘화산학 교과서’로 불리는 수월봉, 마그마가 천천히 굳어지면서 종 모양을 한 산방산, 바닷속에서 마그마가 끓어올라 분화구를 이룬 성산일출봉은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대표 명소이다. 제주도가 자랑하는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 3관왕 타이틀은 오름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이들 오름의 매력에 빠져 오름 수보다 많은 동호회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유명 연예인이 다녀간 오름에 수많은 인파가 뒤따르면서 생채기가 났다. 길을 내고, 화산쇄설물(송이)을 파내고, 골프장을 짓느라 여기저기 파헤쳐졌다. 뒤늦게나마 마을, 단체 등이 오름을 하나씩 맡아서 정성껏 돌보고 있지만 한 번 상처 난 오름은 쉽게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오름은 제주 미래의 가치이고 생존을 결정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오름 관리는 사람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올라가서 구경하도록 편의시설을 만들고, 망가지면 보수하는 식입니다. ‘오름에 있는 생명이 오름의 주인이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손님으로 찾아가 자연의 소리를 가만히 경청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김 대표는 최근 제주연구원에서 발표한 ‘오름 자율탐방관리시스템 개발 및 운영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탐방예약제를 비롯해 탐방객 스스로 훼손을 방지하고 보전, 관리하는 센터 설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오름보전연구회원 등과 함께 일본, 이탈리아에 있는 화산체를 답사할 계획이다. 그곳 화산체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을 비교하면서 교류를 넓힐 생각이다. 오름에서 만난 이들과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발간도 고민 중이다.

“올레길이 한창 유행일 때 오름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바로 거절했습니다. 한국에 많은 길이 만들어졌는데 과연 생태학적으로 좋은 면이 있었는지 둘러보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필요 없는 길을 없애는 운동을 하고 싶어요. 자연은 ‘저절로 생겨난 것을 원래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이게 제 꿈입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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