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명인열전]“문헌기록 없이 현장서 구전 확인해야 진정한 프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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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향토사학자 김정호씨

김정호 씨는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지역 향토사를 개척하고 체계를 정립한 재야의 사학자다. 그는 “향토사는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그들만이 만들 수 있었던 특수함을 찾아가는 작업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김정호 씨는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지역 향토사를 개척하고 체계를 정립한 재야의 사학자다. 그는 “향토사는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그들만이 만들 수 있었던 특수함을 찾아가는 작업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만나 보니 과연 무불통지(無不通知)하고 박학다식(博學多識)했다. 그가 ‘학고(鶴皐) 선생’으로 불리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학고’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학명(鶴鳴) 편에 나온다. ‘학명구고성문우천(鶴鳴九(고,호)聲聞于天·학이 깊숙한 못가에서 울어도 그 소리는 하늘에까지 들린다)’이란 구절에서 따 왔다. 군자는 깊숙이 숨어 있어도 명성이 자연히 세상에 높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는 과분한 호(號)라고 겸손해 했지만 향토사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풍성한 저술 활동을 가늠해 보니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었다.

김정호 씨(79)는 30년 넘게 지역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언론인이다. 그가 노년에 향토사학자란 명함을 갖게 된 것은 오랜 기자 생활의 노하우가 밑바탕이 됐다. 특유의 오기와 배짱, 현장을 중시하는 부지런함,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통찰력은 잠자고 있던 지역의 문화유산을 일깨우고 생명을 불어넣었다. 지역민들이 역사적 사건이나 무너진 성터, 절간의 창살무늬, 서낭당이나 작은 돌부처 하나하나에 얽힌 내력은 물론이고 문화사적 배경과 가치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런 ‘지적인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

○ 지역 향토사를 꿰뚫는 언론인

전남 진도군 임회면이 고향인 그는 젊은 시절 고시(高試)를 준비하며 입신양명을 꿈꿨다. 목포고와 조선대 법정대를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접었다. 1963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광주 주재기자(당시는 특파원으로 불렀다)로 발령받았다. 1969년 본사로 올라가 근무하던 중 인생의 가르침을 준 선배 기자를 만났다. 2006년 작고한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이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를 쓰기 시작해 22년 11개월 10일 동안 모두 6702회를 연재한 한국학의 개척자다.

“당시 조사부장이던 이규태 씨가 서울에서 향토사학을 해 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더라며 지방에 가서 전공을 하면 나중에 업적이 될 수 있고 지방자치가 되면 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지방대 출신이 서울에서 출세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낙향을 결심했어요. 용꼬리보다 닭머리가 되는 게 낫겠다 싶었죠.”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로 직장을 옮긴 그는 이듬해 출입처는 팽개치고 전남의 유무인도를 훑고 다녔다. 배낭에 미숫가루와 카메라, 필름, 망원렌즈 등을 챙겨 뭍에 딱 두 번 오른 것을 빼고 2개월 동안 섬을 돌았다. 여객선, 행정선, 병원선, 등대주유선, 경비정, 어업지도선, 나룻배, 모래채취선 등 배라고 생긴 배는 모두 타 봤다. 1년 동안 ‘섬 섬사람’을 연재하면서 섬이 육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임을 일깨웠다. 이 기획물로 1972년 기자로서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한국신문상’을 받았다.

“섬을 취재하면서 역사 공부가 부족함을 느껴 1년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설한 강좌를 들었습니다. 새벽 고속버스로 올라가 오후에 강의를 듣고 오후 6시 막차를 타고 내려오면 밤 12시가 다 돼요. 차 안에서 책을 참 많이 봤던 것 같아요. 그때 무공을 좀 쌓았지요.”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탄생한 광주일보에서 조사실장과 향토문화연구소장을 맡았다. 전남의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옛터’란 연재물을 2년간 실었는데 인물이 빠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게 보학(譜學)이다. 이후 그가 쓴 ‘전남본관성씨고(全南本貫姓氏考)’와 ‘전남의 토박이’는 당시 민감한 연재물이었다. 족보라는 게 집안 내력을 내세우려고 더러 가공이 섞이는 법인데 그는 어느 집안 족보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고 곧이곧대로 기사를 썼으니 사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네 차례나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고 어떤 문중은 신문사를 항의 방문하고 심지어 사장에게 파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성씨를 다루는 것은 학자들도 금기로 여길 정도였어요. 어설프게 썼다가는 큰코다치죠. 근래 만든 족보를 확보하고 규장각에서 조선시대 만들어진 족보들을 복사해 대조하면서 썼지요.” 그는 “문중 항의를 반박할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에 한 번도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학계도 무시 못 하는 향토사학자

1990년 언론계를 떠나자 향토사학에 대한 식견을 높이 산 전남도가 그를 영산호농업박물관장으로 모셔 갔다. 5년간 처음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정년퇴임 기념문집을 후학들의 헌정으로 펴낸 뒤 책 제목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2011년까지 7년 동안 진도문화원장을 지내면서 진도를 흥이 넘치는 고장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60여 권의 책을 펴내고 200여 편의 소논문(단편)을 발표하면서 향토사 곳간을 풍성하게 채웠다. 향토사 연구에서 ‘아마추어’라 할 수 있는 그는 ‘프로’인 대학교수들과 자주 부딪쳤다. “문헌 기록도 없이 현장을 찾아 구전이나 지명, 유물을 직접 확인하고 체계화하는 사람이 진정한 전문가입니다. 학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프로가 많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가끔 객기를 부렸지요.”

학위만 없을 뿐이지 이미 향토사의 고수 반열에 오른 그를 이해준 공주사대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향토사에 관한 한 광주 전남이 가장 선진적이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공이 선생에게 돌아가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평생 3가지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는 실패하고 둘은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고향에서 밭농사를 짓다 노력 부족으로 3년 만에 접었어요. 비교우위가 단연 글농사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죠. 아들이 하나 있는데 법대나 의대를 가려고 하는 것을 말려서 서울대 해양학과에 보냈어요. 바다를 전공해야 미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제법 성공해서 생활비를 두둑하게 보내 줍니다.”

그는 지난해 12월 무등산 호랑이 등 광주 근현대사를 담은 ‘광주산책(하)’를 출간했다.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4년 11월 펴낸 광주산책(상)의 연속 작업 결과물이다. 이제 쉴 법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있다. 기고문과 칼럼을 1주일에 서너 편 쓴다. “숨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싶어서요. 글을 안 쓰면 치매에 걸릴 것 같거든요.” 인생의 여백을 글로 채워 가는 그는 영원한 기자였다.

▼‘취재수칙’ 잊지않은 언론계 老선배… 인터뷰前 강연록 읽어오게 만들어▼

7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책 한 권과 강연록 하나를 건네줬다. ‘김정호 이야기’라는 책은 그가 진도문화원장을 퇴임하면서 정리한 비망록을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강연록은 3년 전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주최한 ‘원로 명사에게 듣는 호남이야기’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는 책과 강연록을 읽어보고 다시 오라고 했다. 인터뷰 전에 사전 취재를 꼼꼼히 해야 한다는 ‘취재수칙’을 노(老)선배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300여 m 떨어진 곳에 서재이자 지인들의 사랑방인 ‘광주향토문화연구소’에서 다음 날 다시 만났다. 저서를 살펴보면서 한자 이름 가운데 정 자가 ‘우물 정(井)’과 ‘바를 정(正)’으로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고 연유를 물었다. 호적 이름은 ‘井’인데 우물에 물이 고이면 남들이 퍼가고 막상 나에게 남는 건 없다고 해서 40대 초반에 ‘正’자로 바꿨는데, 나이 50이 넘어서 다시 찾았다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게 세상 사는 이치”라면서 “그래도 10년 정도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으니 크게 잃은 것도 없다”며 웃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기자에게 책꽂이에서 7권을 골라 안겨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발걸음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이 넉넉한 품새의 무등산을 닮았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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