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을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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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올봄 함께 일하는 3명의 팀원과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워크숍이었지만, 대부분의 일정이 먹고 즐기는 것이라 모두 들떠 있었다. 오전 일찍 여행지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호텔에 짐을 맡기고 시내 투어를 떠났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체크인을 하기 위해 호텔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짐을 맡길 때 오후 2시부터 체크인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여유롭게 3시까지 호텔로 돌아왔는데 방 청소가 다 끝나지 않아 체크인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회사 일도 있었고, 옷도 갈아입어야 해서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했다.

호텔 측은 30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을 주지 않았다. 팀원 한 명이 프런트에 가서 언제쯤 방에 올라갈 수 있을지 문의했다. 영어가 좀 더 유창한 다른 팀원까지 합류했지만,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을 무렵에야 서비스 매니저가 나타나 사과했다. 그제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이미 호텔 측이 약속한 시간은 훨씬 넘긴 후였다.

호텔 측의 무성의한 응대 때문에 우리의 오후 일정은 모두 망가졌다. 기분도 나빠졌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사소하더라도 싫은 소리를 남에게 하는 게 즐거울 리 없잖은가. 우리는 ‘혹시 우리가 프런트 직원에게 너무 심하게 항의한 것은 아닐까’라고 몇 번이나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팀원 중 누군가 말했다. “이래서 갑질도 해본 사람이 하는 거라니까요.”

우리는 갑보다는 을로 사는 시간이 훨씬 긴 사람들이다. 홍보회사에 다니며, 일을 의뢰한 기업이나 제품 등을 대신 홍보하는 일을 한다. 업무 특성상 나의 사정보다는 갑인 의뢰인의 사정에 맞추는 게 일반적이다. 홍보나 기사를 위해 여러 기자를 만나고 여러 부탁을 하는 일도 일상이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도 많다.

하지만 같은 을이라고 해서 호텔의 입장이 다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프런트 직원이 방 청소 상태까지 일일이 점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사과나 설명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처지를 바꿔 내가 회사에서 일할 때를 떠올려봤다.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피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최선을 다하려 했다. 몇 년 전 회사 일 때문에 멀리 있는 섬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연락선을 타고 가야 했는데 하필 안개가 많이 껴서 배가 결항했다. 10명이 넘는 팀이 다시 섬을 찾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반드시 그날 섬에 가야만 했다. 우리 팀은 온 어촌계를 뒤진 끝에 작은 배를 빌려 섬으로 향할 수 있었다.

최선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안 것은 아니다. 아직 젊지만, 지난 시간에도 대입이나 취업처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관문을 지나왔다. 그때마다 나는 딱 되는 만큼만 노력하며 살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스스로 바뀌었다기보다는 상황이 나를 변하게 하였다. 일을 미루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책임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노력을 모두가 알아주지는 않지만 크든 작든 보상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날 때부터 ‘갑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을의 자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직장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날이면, 퇴근길에 눈물부터 쏟아진다. 부끄럽지만, 부모님이 엄청난 부자여서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도 늘 편안한 자리에 있었다면 최선을 다하는 의지는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되는대로 살며, 만족했을 것이다.

을로 사는 것이 나쁘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내 사정만 중요했던 과거와 달리 남의 사정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호텔에서 작은 소동이 있던 그날, 저녁시간을 이용해 우리는 다시 프런트를 찾았다. 그들 역시 우리를 위해 작은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사과의 말을 전한 뒤 무거운 마음을 털고 즐겁게 저녁식사에 나섰다. 식사 후 방으로 돌아온 우리를 반긴 것은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한 장의 카드였다. 카드에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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