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 해보면 잠월미술관, 미술교사 부부가 8년전 개관
한글-그림-사진 등 수업 개설… 주민참여하는 전시회도 열어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에 사는 할머니가 그린 그림. 할머니들이 그린 꽃 그림과 편지, 일기장, 시 등 작품은 이달 말까지 잠월미술관에 전시된다. 잠월미술관 제공
‘엄마다. 내가 너한 때 편지 써본다. 너도 몸이 건강하지. 나도 요새 좀더 조아진 것 같다. 우리 손주도 보고십다. 매누이(며느리)도 보고십다. 우리 아들 보고십다. 2013. 12. 2 엄마가 사랑한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 산내리 잠월미술관에 걸린 편지다. 맞춤법은 물론이고 띄어쓰기도 엉망이지만 아들 가족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정이 물씬 묻어난다. 편지는 이 마을 할머니가 한글을 처음 배워 아들에게 쓴 것이다. 산내리는 30가구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 잠월미술관은 미술교사인 김광옥(56) 임혜숙 씨(53) 부부가 8년 전 퇴직금을 담보로 마을 한 귀퉁이에 지었다. 마을 뒷산의 모습이 누에를 닮아 미술관 이름을 ‘잠월(蠶月)’이라고 했다.
잠월미술관은 주민과 함께 숨쉬는 산골 미술관이다. 지난해 12월 14일 미술관에서 개막한 ‘산내리 청춘학당’ 전시회에서 한 할머니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잠월미술관 제공잠월미술관은 지난해 8월 ‘찾아가는 문화활동 사업’에 선정된 뒤 마을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왔다. 미술관이 ‘청춘학당’으로 변신한 것이다. 초등학교 문턱조차 밟지 못한 할머니와 가정형편 때문에 중간에 학교를 그만둔 할머니 등 12명은 매주 토요일 오전 미술관에 나와 한글을 배웠다. 자음과 모음을 익힌 뒤 단어를 쓰고 읽으며 글을 깨쳐갔다. 아직도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맞춤법도 틀린 경우가 많지만 미술관은 할머니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 12월 14일부터 전시회를 열고 있다. 처음으로 써 본 일기장부터 직접 지은 시, 꽃 그림, 자식에게 쓴 편지를 이달 말까지 선보인다.
산내리에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마을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외지에서 젊은 작가들이 들어와 전시회를 열어 주민들은 난생처음으로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직접 도자기를 구워 문패를 만들었다. 평생 ○○댁으로만 불렸던 할머니들의 이름이 할아버지 이름과 나란히 내걸렸다. 마을 담벼락에 알록달록 벽화를 그리고 천연염색도 해봤다.
3년 전에는 할머니 7명이 사진작가로 데뷔했다. 미술관이 사진교실을 열자 할머니들은 처음에 영정을 찍어주는 줄 알았다. 직접 사진을 배우고 찍는다는 것을 알고는 강의에 빠짐없이 참석해 ‘디카’를 배웠다. 처음 카메라를 만져본 할머니들은 신기한 듯 마을 곳곳을 누비며 셔터를 눌러댔다. 앵글에 비친 회색빛 담 아래 소담하게 핀 들꽃과 마을 우물에 비친 하늘, 집 뒤뜰 장독대가 작품이 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정앵순 할머니(78)는 “찍은 사진으로 어엿한 전시회까지 열었으니 호강한 셈”이라며 “적막하기만 했던 마을이 미술관이 들어오고 나면서부터 들썩들썩한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문턱 없는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밭 매다가도 오고, 논일하다가도 들른다. 이광연 이장(57)은 “미술관이 매년 한두 차례 주민들을 위한 전시회를 마련해준다”며 “산내리가 문화예술마을로 알려지면서 귀농인이 10가구나 늘었다”고 말했다. 새 전시가 시작되는 날은 마을 잔칫날이다. 이장은 신나는 음악을 틀면서 마을 방송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미술관을 찾는다. 미술관 뒤쪽 마당 가마솥에서 푹푹 삶은 돼지고기와 쑥버무리, 모시떡을 한 상 가득 내온다.
김광옥 잠월미술관장은 “마을 어르신들은 봄이면 고사리 등 나물을 미술관 문 앞에 놓고 갈 정도로 정겹다”며 “작고 느리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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