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家長들의 ‘슬픈 두 자화상’

  • Array
  • 입력 2012년 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가족부양 허리 휘고… 자부심에 허리 펴고
■ 여성정책硏 성역할 검사

“여자친구는 결혼하자고 하는데 너무 두렵습니다. 결혼하면 가장으로서 경제적, 정신적으로 책임이 많아질 것 같아 심한 압박감을 느낍니다.”(32세 남성)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인데, 집에는 당분간 말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운전 잘하고, 뭐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연락 바랍니다.”(49세 남성)

한 남성 취미동호회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고민의 내용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최근 개발한 ‘한국형 남성 성역할 갈등검사’에 따르면 한국 남자들은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이 다른 나라 남성들에 비해 강하다. 남자라면 돈을 열심히 벌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많이 노출돼 있다는 뜻이다.

연구원은 지난해 19세 이상 남성 1800명을 면접조사한 뒤 한국 현실에 맞는 ‘남성 성역할 갈등 검사표’를 개발했다. 조사 항목은 ‘성공 권력 경쟁’ ‘감정표현 억제’ ‘일 가정 양립 갈등’ ‘남성과의 애정행동 억제’ ‘남성 우월’ ‘가장 의무감’ 등 총 6개 분야 37개 항목이다. 이 가운데 가장 의무감은 외국에서는 따로 조사하지 않는다. 연구를 진행한 이수연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남성의 가장 의무감이 유난히 강해 평가 항목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특이한 점은 한국 남성에게 가장 의무감은 스트레스이기도 하지만 ‘남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죽어라’ 일한 뒤에 “나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심리적인 위안감과 만족감을 얻는 식이다. 이런 점 때문에 가장 의무감이 때로는 일상적인 우울감이나 가정 및 직장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가장 의무감은 30대 남성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정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심리적인 압박으로 느껴지는 시기다. 심한 경우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 만큼 옥죄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40, 50대 남성들은 생활이 안정되면서 가장 의무감을 통해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러다 퇴직이 시작되는 60세 전후가 되면 가장 의무감은 다시 불안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경제능력을 잃으면서 존재감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가장 의무감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오랫동안 스스로 가장이 중요하다고 ‘세뇌’한 결과다”며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남자니까 강해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훈련한다면 자칫 심리적 내상이 더욱 깊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가장#가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