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美서 자살 확산 막은 ‘포스트 시크릿’ 국내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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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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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엽서에 고민 적다보니 가슴속 응어리 뻥 뚫리네요”

‘포스트 시크릿 코리아’로 도착한 다양한 고민이 담긴 비밀 엽서들. 엽서는 홈페이지(www.postsecret-korea.blogspot.com)에 올려져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다. 쿠스파(KUSPA) 제공
‘포스트 시크릿 코리아’로 도착한 다양한 고민이 담긴 비밀 엽서들. 엽서는 홈페이지(www.postsecret-korea.blogspot.com)에 올려져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다. 쿠스파(KUSPA) 제공
“사람들은 제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너무 숨이 막혀요.”

올해 7월부터 최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동 159 코엑스몰 S-5 MBE #277 ‘포스트 시크릿 코리아’ 앞으로 100여 통의 엽서가 도착했다. 고려대 문화동아리 ‘쿠스파(KUSPA)’가 국내에 상륙시킨 ‘포스트 시크릿(비밀 엽서)’은 보낸 사람이 이름을 적지 않은 엽서로 미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이 엽서에는 대학입시나 성(性), 연애부터 취업과 출산 그리고 자살 관련 내용까지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하루에 한두 통씩 꾸준히 배달되고 있다.

‘포스트 시크릿’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큐레이터이자 작가인 미국인 프랭크 워런 씨. 2004년 그는 ‘비밀을 털어 놓으라’라고 적은 엽서 3000장을 지하철역, 도서관 등의 공공장소에 뿌렸다. 엽서가 배달될 주소는 모두 똑같이 적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나 신원은 적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워런 씨는 사람들이 서로 고민을 나누고 위로하라는 뜻에서 받은 엽서를 모아 전시회를 열고 책도 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4년간 배달된 엽서만 총 15만 통. 엽서에 적힌 사연은 연애나 결혼, 취업뿐만 아니라 자살 고민까지 다양했다. 그러자 서로 자살을 하지 말라고 격려하는 엽서까지 밀려들었다. 엽서를 통해 고민을 털어놓던 사람들이 위로까지 건네기 시작한 것. 워런 씨는 2006년 자살 확산을 막았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정신건강협회가 주는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마침 워런 씨 얘기를 소개한 TV 프로그램을 본 쿠스파 학생들은 같은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워런 씨도 쿠스파의 활동을 허락했다.

이들은 7월 중순부터 고려대 홍익대 등 대학가에 엽서 2000장을 배포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내용도 많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고민이 담긴 엽서가 쇄도하고 있다. ‘성형수술을 받고 싶다’ ‘성적이 낮아 원하는 전공을 할 수 없다’ ‘아이를 낳기 싫다’ ‘불임이다’ 등 젊은이들의 고민은 깊고 다양했다. 동성애와 장애로 겪는 소외감을 솔직히 털어놓은 사연도 많았다.

자살을 고민한다는 사연도 적지 않았다. 쿠스파 회장인 이희윤 씨(23·여)는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혹시 지금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다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치유를 받고 마음을 고쳐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같은 디지털 매체보다 엽서와 같은 아날로그 매체가 심리적 안정 효과가 더 크다고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자체가 자살 방지에 큰 도움이 된다”며 “인터넷은 소통이 빠르고 활발하지만 감정이 흐트러지고 위로가 안 될 수 있는 반면 엽서는 상대가 바로 대답을 요구하지 않을뿐더러 ‘그 누군가는 내 편’이라는 심리적 효과와 안락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프로젝트를 확산시키기 위해 7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인디밴드들과 함께 엽서를 소개하고 관객들이 직접 엽서를 작성하는 콘서트도 열었다. 콘서트를 보던 하모 씨(36·여)는 “시어머니한테 못 했던 말을 좀 적었다. 이렇게라도 적으니 마음이 시원하다”며 “다른 사람의 엽서를 보니 위로를 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쿠스파는 엽서가 더 모이면 워런 씨가 했던 것처럼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도 열 계획이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포스트 시크릿(Post Secret) ::

자신의 고민을 익명의 엽서에 적어 다른 이들과 공유하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 미국인 프랭크 워런 씨가 2004년 처음 시작했다. 아날로그적인 매체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해 자살 확산을 방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대 학생들이 워런 씨 허락을 얻어 올해 7월부터 국내에서도 같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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