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앞에 선 그 소녀 “날 도와준 그분이 나같은 고아였다니…”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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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가 당신이었나요…” 마지막까지 도움받던 소녀의 눈물 2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서울복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철가방 천사’ 김우수 씨의 빈소. 김 씨가 마지막까지 후원했던 신윤희(가명·오른쪽) 양이 찾았다. 김 씨는 한때 어린이 5명을 후원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부모님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라온 신 양만을 끝까지 후원했다. 김 씨에게 2006년부터 후원받아 온 신 양은 올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홀로 세 자매를 키우는 할머니를 위해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키다리 아저씨가 당신이었나요…” 마지막까지 도움받던 소녀의 눈물 2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서울복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철가방 천사’ 김우수 씨의 빈소. 김 씨가 마지막까지 후원했던 신윤희(가명·오른쪽) 양이 찾았다. 김 씨는 한때 어린이 5명을 후원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부모님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라온 신 양만을 끝까지 후원했다. 김 씨에게 2006년부터 후원받아 온 신 양은 올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홀로 세 자매를 키우는 할머니를 위해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28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서울복지병원 장례식장.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며 70만 원 남짓한 월급을 쪼개 다섯 어린이를 도와 온 ‘철가방 천사’ 김우수 씨는 영정에서도 헬멧을 쓴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영정 앞에 단발머리의 한 여고생이 고개를 숙인 채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고 있었다. 김 씨에게서 2006년부터 최근까지 매달 2만∼3만 원씩 후원을 받아온 신윤희(가명·16) 양이었다.

어렸을 적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살아온 신 양은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김 씨의 관심 덕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 양은 어렵게 세 자매를 키우는 할머니를 위해 은행원이 돼 돈을 벌고 싶었다. 그 꿈을 위해 올해 상고에 진학했다.

이날 아침 김 씨의 소식을 접한 신 양은 그동안 미뤄왔던 편지를 한 통 썼다. “저를 돕기 위해서 아저씨는 이렇게 애쓰셨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매일 투정만 부리며 살았네요. 저도 이젠 아저씨를 본받아 남을 열심히 도우며 살게요.” 신 양은 “제대로 보답도 못해 보고 허망하게 떠나시는데 마지막까지 웃고 계셔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멍하니 영정을 바라봤다.

○ 천사의 사랑을 받았던 아이들

김 씨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해 왔던 이정욱(가명·16) 군. 이 군의 어머니 김모 씨(45)도 이날 김 씨의 소식을 듣고 말을 잇지 못한 채 흐느꼈다. “저와 남편도 고아로 자라서 그게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지 잘 알아요. 그런 분이 우리 아이를 도와주셨다니….”

이 군의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몸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 어머니 김 씨가 식당 주방일을 하며 받는 돈에 정부 보조금을 합쳐 한 달 80여만 원이 생활비의 전부였다. 여기에 김 씨가 보내주는 돈은 이들에게 큰 액수였다. 김 씨는 “4년 넘게 이름도 없이 꼬박꼬박 후원해 주던 사람이 자신도 형편이 어려운 고아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그분이 보내 준 후원금으로 정욱이가 평소 못 보던 참고서를 살 수 있게 돼 성적도 많이 올랐다”고 했다.

충북 제천시의 중학생 김민지(가명·14) 양에게도 김 씨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김 양도 지난해 6월까지 월드비전을 통해 김 씨로부터 매달 2만∼3만 원을 후원받았다. 김 씨는 2009년 6월 김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원자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응원해 주시는 투명인간 같아요”라고 쓰기도 했다.

당시 김 양의 집은 어머니 홀로 식당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늦둥이 남동생이 생기면서 어머니마저 일을 그만둔 상황이었다. 김 씨의 후원금은 김 양 가족에게 작지만 따뜻한 희망이었다. 김 씨는 매달 보내는 후원금 외에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설날은 물론이고 김 양의 생일에도 매번 2만∼3만 원을 보냈다. 김 양은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아저씨 바람대로 나중에 커서 꼭 남을 도울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김 양의 어머니는 “지방에 사는 탓에 빈소에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김 씨의 격려 덕분에 딸이 성격도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고마운 마음이 꼭 전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 후원 아동과 찍은 사진이 유일한 재산

김 씨가 살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 4.95m²(약 1.5평)짜리 고시원 방은 28일 기자가 찾았을 때 한낮인데도 전등 스위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웠다. 방에 남아 있는 김 씨의 구형 휴대전화에는 일하던 중국집 직원과 사장, 고시원 총무 전화번호 외에는 아무것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 김 씨가 세상과 교류한 흔적은 김 씨가 후원했던 아동들의 증명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뿐이었다. 액자에는 아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함께 적혀 있었다. 방에 남아 있는 김 씨의 통장에는 20일 어린이재단 앞으로 후원금 3만 원을 송금한 기록이 있었다. 김 씨의 마지막 기부였다.

김 씨가 일하던 강남구 일원동 중국집 이금단 사장(45)은 “김 씨가 생전에 결혼할 만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고아로 컸던 기억 때문인지 쉽사리 결혼을 결심하지 못했다”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대신에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도우며 자신의 상처를 씻어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사고가 나던 날 김 씨가 오토바이 시동을 걸며 여러 아파트 단지를 들러 그릇을 한꺼번에 수거해 오겠다고 했는데 그걸 말리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씨는 3년 전 폐 수술을 받은 뒤 형편이 더 어려워져 2010년 6월 어린이재단을 통해 후원하던 신 양 외에 다른 아동들에 대한 후원은 중단해야 했다. 신 양이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점 때문에 김 씨가 끝까지 후원을 이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빈소를 찾은 어린이재단 후원회장 최불암 씨(71)는 “남몰래 아이들을 도와 온 김 씨의 선행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을 줬다. 진실은 아무리 숨겨도 언젠가는 알려지기 마련인데 그게 죽음을 통해 밝혀졌다는 게 씁쓸하다”고 말했다.

한 중년 남성은 조문 뒤 빈소 구석에 앉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돈을 허튼 데 쓰고 살았다. 고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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