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만에 34% 늘어난 살림하는 남자… ‘슈퍼대디’ 2명이 말하는 즐거운 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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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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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대디, 프렌디, 트로피 허즈번드의 공통점은? 살림하는 남자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슈퍼맘처럼 일과 가사에 모두 능한 아빠를 슈퍼대디, 육아에 적극적이라 친구 같은 아빠는 프렌디(friend+daddy), 바쁜 아내 대신 가사를 도맡아 트로피를 받을 만한 남편은 트로피 허즈번드(trophy husband)라고 한다. 한국에도 살림하는 남자가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남자 중 ‘가사’를 맡은 사람은 15만6000명. 2005년보다는 34.5%, 2009년보다도 7.6% 늘었다. 벤처기업 대표인 아내를 대신해 15년째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박찬호 씨,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잘나가던 광고디자인 회사를 관두고 육아에 나선 김재명 씨를 만나봤다. 》

■ 일-가사 ‘15년차’ 박찬호 씨
“장모도 딸보다 ‘주부 사위’ 믿어요”


슈퍼대디 박찬호 씨는 퇴근하자마자 20분 만에 밥상을 차렸다. 여력 있는 사람이 집안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아빠 덕분에 정우, 지우 양은 엄마의 빈틈을 느낄 겨를이 없다. 파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슈퍼대디 박찬호 씨는 퇴근하자마자 20분 만에 밥상을 차렸다. 여력 있는 사람이 집안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아빠 덕분에 정우, 지우 양은 엄마의 빈틈을 느낄 겨를이 없다. 파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집에 들어서자 양복 재킷을 벗기부터 식탁을 차리기까지 20분이나 걸렸을까. 수저를 놓으며 첫째 딸(13)을 부른다. “지우야, 밥 먹어라.”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안방에서 낮잠을 자던 둘째 딸(5)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정우는 달걀프라이 해서 밥에 간장 넣고 비벼 줄까?”

한국폐기물협회 사무국장 박찬호 씨(45)는 이런 일을 올해로 15년째 해왔다. “요리, 설거지, 청소, 장보기, 아이들 챙기기…. 자연스럽게 적응됐어요. 남자들이 다 꺼린다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도 괜찮은데 빨래 널기 싫은 건 여전하네요. 하하하….”

시작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1997년 결혼할 때 아내 배순희 씨(40)는 대덕연구단지 삼성중공업의 연구원이었다. 주말 부부로 지내며 박 씨는 집안일에 조금씩 손을 댔다.

아내는 일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결혼 조건은 두 가지였다. 출산은 2년 뒤로 미루고, 직장 생활을 계속한다는. 그러나 바로 임신한 뒤 입덧으로 먹지도 못하고 탈수 증세가 심해 스스로 직장을 관뒀다. 1년간 육아를 하며 배 씨는 우울해졌다. “아내는 저와 달리 밖에서 활동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어요.”

박 씨는 아내에게 다시 직장에 나갈 것을 권했다. 아내는 국내 최대 전자책 업체였던 북토피아에서 근무하더니 2008년 벤처기업 북큐브네트웍스를 창업했다. 지난해에는 전자책 단말기까지 출시해 업계에서는 ‘전자책의 일인자’로 통한다.

아내가 일을 하면서 집안일은 박 씨 차지가 됐다. 쉽지는 않았다. 장남에다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박 씨는 결혼 전까지 주방 한번 들어가 본 적 없었다.

주위에서 한 소리씩 했다. 절대 주방에 들어가지 말라, 처갓집은 가능한 한 멀리 해라…. “직장 상사와 동료들은 아내 군기 잡는 법, 남편 대접받는 법을 강의하기 일쑤였죠.” 박 씨는 달랐다. “아내가 피곤해하는 걸 보면 제가 하고 싶어지던걸요. 가정이 행복한 데서 안정을 찾기도 하고요.”

가족이 적응하기까진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지우가 초등학교 2, 3학년 때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급식당번에 직접 갔다. “아빠가 온 경우는 전교에서 저밖에 없었어요.” 지우는 창피했던지 아빠를 알은척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반 아이들이 앞치마를 당기며 “아저씨는 누구 아빠예요?”라고 물으며 잘 따르자 딸의 마음이 풀렸다.

이제 지우는 아빠의 엄마 역할을 돕기도 한다. 오후 4시 반 유치원에서 정우를 데리고 와 아빠가 올 때까지 놀아주거나 낮잠을 재운다. 딸이 주부 노릇을 잘 못해 항상 미안해하던 장모도 이제는 사위를 전적으로 믿는다. 박 씨는 “장모님이 반찬거리를 놓고 가면서 어떻게 해먹어야 할지 아내가 아닌 내게 말씀하신다”며 웃었다.

일과 가사를 모두 잘하는 여성이 ‘슈퍼맘’이라면 박 씨는 ‘슈퍼대디’인 셈이다.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지우를 학교에 내려주고 출근한다. 오후 6시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해 경기 파주시 집에 7∼8시쯤 도착한다. 저녁을 차려 함께 먹고는 세탁기를 돌린다. 그사이 전날 건조대에 널어뒀던 옷가지를 개키고 청소를 한다.

주말은 더 바쁘다. 아무리 늦어도 오전 7시에 일어난다. “아내는 잠으로 피로를 풀어서 12시간도 자요. 저는 움직이면서 풀죠.” 아침을 차리고 구석구석 쓸고 닦고, 아내가 쉴 수 있게 아이들을 데리고 논다. 장을 봐서 저녁에는 지우가 좋아하는 고기를 굽는다.

여자도 하기 힘들다는 일과 가사의 병행. 하지만 집안일에 맞고 여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본다. “남자 주부가 느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남편이 아내보다 내성적이고 살림을 잘하는데도 사회적 관념 때문에 역할을 바꾼다면 불행하겠죠. 어떤 역할이든 부부가 조화롭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박 씨에게 집안일은 피곤하지 않다. 오히려 행복을 얻는다. 가정이 평화롭기 때문. 그는 “운동을 하며 육체 건강을 지키듯 집안일로 정신 건강을 지킨다”며 “아내도 아이들도 행복해한다”고 강조했다.

박 씨는 앞으로도 집안일을 주도적으로 할 생각이다. 한술 더 떠 기회가 된다면 전업주부 역할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단다. “저는 바깥일보다 집안일이 더 좋거든요. 제가 잘해야 나중에 사위에게도 큰소리칠 수 있지 않겠어요. 딸들이 가사와 일 모두 하느라 허덕인다면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파주=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직장 그만둔 ‘2년차’ 김재명 씨
“디자이너는 많지만 건우아빤 하나”

김재명 씨가 경기 남양주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아들 건우와 장을 보고 있다. 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오로지 아빠로만 살 계획이라고. 남양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재명 씨가 경기 남양주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아들 건우와 장을 보고 있다. 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오로지 아빠로만 살 계획이라고. 남양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경기 남양주시 자택에서 김재명 씨(35)는 뽀로로 매트 위를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14개월 된 아들 건우.

“세상에 디자이너는 많지만 건우 아빠는 나 하나잖아요.”

일과는 아이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 오전 7시 건우가 잠에서 깬다. 아내 김선정 씨(33)가 영어학원 출근 준비를 할 때 남편은 상을 차린다. 아내가 출근하고 아이와 놀다보면 오전 10시 간식 시간. 주로 과일이나 구운 식빵을 먹는다. 낮 12시쯤 아이가 낮잠을 자면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아내가 퇴근하는 오후 7시까지 반복한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소파에 앉을 틈조차 생기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이라 따라다니기만 해도 숨이 차요. 처음에는 아이가 낮잠을 자면 녹초가 돼 같이 쓰러지곤 했죠.”

오후 10시 반경 아이가 잠이 들면 아내는 이유식을, 남편은 내일 식사를 만든다. 절호의 부부 대화시간이다. ‘건우가 뽀뽀뽀라고 말했다’, ‘오늘은 공을 얼마나 멀리 던졌다’…. 아내에게 전할 이야기가 많다.

아내가 임신 5개월이 지났을 무렵 남편은 광고디자인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진다. “그저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아이의 성장을 매일 지켜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그래도 모두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인생에서 2, 3년은 아이와 온전히 보내고 싶었어요. 회사를 다닐 적에 선배들이 밤샘 야근, 주말 출근을 자주 하니 아이가 아빠를 못 알아본다고 탄식하곤 했어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가장 든든한 지지자는 아내의 친구들. ‘결혼 정말 잘했다’, ‘남편 최고다’…. 아들을 걱정하던 부모도 손자가 감기 한번 앓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격려한다.

하지만 남편 친구들의 반응은 아직 뜨악하다. “입으로는 ‘대단하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려요. 남자가 일을 포기하고 아이를 키우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남편 김 씨는 “자연스럽게 건우를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임신한 아내는 입덧이 몹시 심했고 임신중독증으로 신장에 이상이 왔다. 친정식구가 모두 외국에 살아 산후 조리는 남편 몫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부터 함께 생활했어요. 집에 와서 미역국 끓이고 건우 돌보는 것도 해야 했죠. 그러면서 아이를 직접 키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어요.”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기 소리에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부부의 결심은 굳건했다. “어른도 출퇴근이 힘든데 아이에게 어린이집 출퇴근을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어릴 적 부모와 지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아이한테도 그런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고요.”

좋은 아빠가 되려고 공부도 많이 했다. ‘삐뽀삐뽀 119’ ‘아이가 잘 먹는 이유식 따로 있다’ ‘60분 부모’같이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책을 줄줄 외운다.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에는 인터넷서 요리법을 찾아 오전 2, 3시까지 만들었다. 요즘은 간을 하지 않은 카레, 연어구이, 동그랑땡이 식단에 자주 오른다.

이런 그도 마음속 갈등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따금 프리랜서로 일하지만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주는 게 좋은 아빠일까,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해주는 게 좋은 아빠일까. 갈등이 심했다. 아내가 집에 와서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힘들어할 때는 자신이 돈을 벌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고생을 덜 시키는 길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빠를 보고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와 안길 때, 볼을 비비며 뽀뽀할 때 고민은 모두 사라진다. “지금 아이의 이 모습을 못 본다고 생각하면 분명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라는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건우가 세 살이 되면 그는 다시 일을 시작할 생각이다. 그때면 엄마 아빠 품을 떠나 다양한 자극을 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서다. 아내 김 씨가 “우리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인생을 계획했는데 ‘남편이 무능해서 부인만 일 시킨다’는 식의 편견을 접할 때마다 너무 미안하다”며 속마음을 비친다. 하지만 남편은 “아이와 함께한 3년의 기억이 30년을 행복하게 해 줄 것 같다”며 아이를 보고 활짝 웃었다.

남양주=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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