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27일 대법원의 유죄확정 판결로 도지사직을 잃었다. 이날 오후 이 지사가 강원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춘천=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기적’은 없었다.
이광재 강원도지사는 지난해 9월 2일 직무정지란 족쇄가 풀리자 “기적처럼 다시 돌아왔다”고 감격해했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27일 대법원 판결로 도지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이 지사는 앞으로 10년간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됐다. 민주당의 불모지였던 강원도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내리 두 번 당선됐고 도지사 선거에서 압승하며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까지 부상했던 그가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면 복권이 이뤄지지 않는 한 후일을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23세 때인 198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원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최대 위기다.
이 지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동갑내기인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함께 ‘좌(左)희정, 우(右)광재’로 불리던 노 전 대통령의 386 핵심 측근이었다. 노무현 정권 출범 원년인 2003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비서실장,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3대 요직으로 꼽히던 대통령국정상황실장에 기용돼 실세로 급부상했다. 39세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는 검찰의 권력형 비리 수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등 검찰과의 악연을 이어갔다. 2003년 말부터 5년 동안 여섯 차례 검찰과 특검 수사를 받았다. 10개월에 한 번꼴이다. 검찰이 내사한 것까지 합치면 10차례가 넘는다.
처음으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2003년 10월 대통령국정상황실장으로 있던 때였다. 2002년 12월 대선 직전 썬앤문그룹에서 불법 대선자금 1억5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대검 중수부 조사를 받은 뒤 불구속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어 특검 수사도 받았으나 다른 혐의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2005년 4월엔 사할린 유전사업 투자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와 특검 수사를 받았지만 혐의가 없는 것으로 종결됐다.
18대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한 뒤에도 17대 총선 직전 S해운 측에서 1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때도 살아남았다.
‘불사조’ 같던 그를 발목 잡은 것은 박연차 게이트였다. 2008년 말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탈세 혐의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다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면서 검찰 수사로 확대됐고 이 지사도 박연차 게이트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2009년 초 박 전 회장 등에게서 2억2000만 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뒤 그해 3월 21일 검찰에 소환됐고 이어 닷새 만에 구속됐다. 비리 혐의로는 첫 구속이었다.
1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나오자 그는 “여러분이 사랑한 젊은이가 막살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겠다. 국회의원의 기득권을 버리고 평범한 사람으로 진실을 가리겠다”며 의원직 사퇴로 반전을 꾀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2009년 5월)라는 격랑 속에서 길을 찾던 그는 항소심이 진행되던 지난해 4월 강원도지사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와 맞물린 그의 ‘고난’은 10만여 명에 이르는 강원도민의 탄원과 구명운동이라는 기현상으로 이어졌다. 선거 직전에는 부친이 선거운동 중 폭행을 당해 선거운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열세라는 예상과는 달리 ‘깜짝 승리’로 이어지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 재판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도지사 당선 직후인 6월 11일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추징금 1억1417만 원이 선고돼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됐다. 그러자 “확정판결 전에 직무를 정지하도록 한 지방자치법 규정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헌재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두 달 만에 업무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직무에 복귀하며 기사회생하는 듯했던 이 지사. 2018년 겨울올림픽의 평창 유치를 위해 발로 뛰는 열정을 보여줬지만 결국 박연차 게이트 벽을 넘지 못하고 147일이란 단명 도백(道伯)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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