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 모습 떠올라… 제발 TV 좀 치워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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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나만 즐거워할 수는 없다”
가족들 와도 “돌아가세요” 면회 거부하고 잠도 못 자

폭발음이 들리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을 때 강태영 병장은 부모님을 떠올렸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부모님을 한번이라도 더 뵐 수 있었으면….” 그는 허리와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았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28일 어머니는 아들이 입원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립던 아들을 꼭 껴안고 놓지 않는 어머니에게 강 병장은 “이제 그만 가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나만 부모님 만나 즐거워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 사고 발생 5일째인 30일 국군수도병원을 찾는 구조자 가족들의 발길이 부쩍 줄었다. 아직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장병들이 면회를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구조자들이 비교적 안정적이며 심리치료도 예방 차원으로 하는 것”이라 밝혔지만 실제로 많은 장병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다는 것이 가족들의 증언이다. 강 병장은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가족 면회조차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어머니와 큰형이 일요일 찾아가 만난 게 마지막이다. 강 병장의 큰형은 “첫날 면회 때도 잠시 보고 나니 ‘어서 가라’며 보냈다”며 “매일 가고 싶어도 태영이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면회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병장은 천안함에서 취사병으로 일했다. 매끼 직접 밥을 지어 퍼줬던 동료들이기에 실종 사실이 더욱 안타깝다. 특급요리사가 꿈인 강 병장은 평소 손님들에게 요리해주는 것을 즐겼다. 강 병장의 형은 “아홉 살이나 많은 형에게도 늘 밝고 까불까불하던 동생이었는데 말수도 줄고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며 “사고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고 안타까워했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인 배성모 하사도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눈을 감으면 자꾸 사고 당시 상황이 떠올라 밤늦도록 눈을 뜨고 있다가 잠이 든다. 작은 소리에도 사고 당시 소음이 떠올라 잘 놀란다고 한다. 배 하사의 이모는 “면회 때 성모가 사고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목소리가 떨려 알아듣기 힘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여 그만 말하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사촌동생도 “평소 착하고 동생들을 잘 데리고 놀아줬던 오빠가 말수도 줄고 무표정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안석균 교수(45)는 “죽음의 공포를 겪으면 후유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사고 당시 들었던 ‘펑’ 소리가 맴돌면서 전화벨 소리에도 놀라게 되고 심한 경우 사고와 연관된 장소를 회피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고 전했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TV 시청을 금지하고 있는 신은총 하사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다. 방송에 나오는 사고 소식 때문에 자꾸 혈압이 올라 병원 측은 부득이하게 TV 시청을 막고 있다. 신 하사의 아버지 신원향 씨(57)는 “관심이 온통 동료들 소식에 있는 것 같다”며 “은총이가 형, 동생처럼 아끼던 사병들이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 신 씨는 누가 살았고 죽었는지, 실종자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천안함 함미가 발견됐다는 소식도 일부러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29일에는 반입이 가능한 CD플레이어와 심리치료용 음악을 챙겨가기도 했다.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 채정호 교수(49)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장애도 무척 크다”며 “특히 군에서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황을 반복해 물어보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인 배려가 부족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성남=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 동영상 = 천안함 사고직후 승조원 구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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