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비가 근본 ‘불씨’… 갈등 조정할 제도적 틀 없어 ‘火’ 커져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 참사 계기로 본 철거민 문제

철거민 “생존권 투쟁” vs 사업자 “보상 노린 몽니”

‘빨리빨리’ 사업 추진 대신 대화 통한 접점찾기 필요

21일 오전 경기 용인시 기흥구 중동 옛 어정가구단지.

한 건물 옥상에 10m 높이의 철제 망루가 높이 솟아 있다. 이 지역 세입자들은 2007년 12월부터 주거 생존권 쟁취 등을 요구하며 1년 넘게 농성을 벌이고 있다.

용인시와 도시개발사업조합 등은 몇 차례 강제 철거를 시도했지만 사고 위험이 높아 번번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용산 재개발 4지구 참사를 계기로 도시재개발과 철거민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활 터전을 떠나야 하는 영세 세입자들에게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일 수 있지만 투쟁을 과도한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일부 집단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쟁 과정에서 사업자와의 극단적 대치로 이번처럼 목숨을 잃는 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해 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개발 철거민 사태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 등을 짚어봤다.

○ 보상비가 뜨거운 감자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은 보상비다. 현재 철거지역 세입자에 대한 보상은 2007년 4월 개정된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시행 규칙에 근거해 이뤄진다.

가옥 세입자는 임대주택 입주권과 함께 새집을 얻기 위한 주거 이전비(4개월분)와 이사비를, 상가세입자는 3개월분의 휴업보상금과 이사비를 받는다.

주거 이전비는 통계청이 집계하는 도시근로자 가구의 가구원수별 월평균 가계지출을, 휴업보상금은 이전의 소득증빙서류 등을 토대로 감정평가를 해 받는다.

사고가 난 용산 재개발 지구 가옥 세입자의 경우 4인 가족 기준으로 1400만 원을 받았다.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뉴타운 지역에서 치킨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모 씨는 “권리금만 3000만 원에 인테리어 비용 8000만 원 등 1억2000만 원 넘게 투자했는데 보상금은 1800여만 원을 받았다”며 “이 돈으로 딴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경기 용인의 옛 어정가구단지에서 도시개발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 철거민은 “이 단지 세입자들에게는 건물 면적을 기준으로 3.3m²에 20만∼30만 원 수준의 보상이 이뤄졌다”며 “10년 넘게 영업을 해 온 점을 고려하지 않은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실제 소득을 줄여서 신고하는 경향이 많아 보상액이 실제 소득보다 적게 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소득 신고는 실제보다 적게 하면서 보상은 실소득 기준으로 받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 생존권 투쟁 vs 보상비 투쟁

철거민 투쟁은 생존을 위한 것과 좀 더 많은 보상을 위한 것으로 나뉜다.

청계천 복개 공사가 한창이던 2003년 11월 청계천변 노점상 1500여 명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시의 강제 철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노점은 불법이라 철거로 인한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서울시는 결국 노점상의 생존권을 인정해 서울 동대문운동장 안에 풍물시장을 만들고 이들을 이주시켰다.

반면 재개발에 편승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례도 많다. 2005년 말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1년간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인 서울 은평뉴타운 지구 주민 중에는 139m²의 분양 아파트 자격을 가진 사람이 165m² 이상의 아파트 입주권이나 230m² 이상의 단독주택 용지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이 개입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05년 4월 경기 오산의 한 택지개발지구에서는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 등에 용역직원 한 명이 맞아 사망했다. 당시 시위에는 전철련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경찰은 전철련이 철거민들에게 망루 설치 방법 및 제작을 지원하는 등 사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 충분한 대화와 보상체계 현실화 필요

기존 재개발 사업의 경우 조합설립부터 사업인가까지 보통 3∼4년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업자와 주민 간에 많은 대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서울시의 뉴타운 건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면서 수도권에서는 이 기간이 크게 앞당겨지는 현상을 보였다는 지적이다.

이번에 참사가 난 서울 용산 재개발 4지구도 불과 4개월 만에 행정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세입자들의 주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립대 최근희(53·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영국은 도클랜드 지역을 재개발하는 데 18년이 걸렸다”며 “사회적 비용이 들더라도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고양 행신택지개발지구에서 지난해 3월까지 15년간 무허가 건물을 짓고 농성해 온 정모(56) 씨는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갈등도 빚었지만 결국 사업주와 협의해 인근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며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다면 극단적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상체계의 현실화도 지적됐다.

일본의 경우 땅값 형성 과정에 주인뿐 아니라 거주자와 임차인의 기여도를 인정한다. 이에 따라 재개발 때 30%의 기여보상비를 주고 있다. 우리의 경우 오랜 기간 장사를 하면서 부동산 가격을 높인 데 대한 적절한 보상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단국대 조명래(54·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철거민들이 새로 토지, 건물 등을 확보할 때 현재의 주거 및 영업활동 수준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상금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고양=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용인=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서울 2011년까지 철거대란 우려

26개 뉴타운 지구 철거대상 주택 12만채

영세 원주민-세입자 갈곳없어 갈등 소지

서울시 관계자 “세입자 보상비 보조 검토”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을 계기로 서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뉴타운과 재건축, 재개발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번 사건은 표면상 세입자와 재개발조합 간의 보상비 갈등에서 비롯됐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업 진행 방식이나 공공성 부족에 더 큰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서울의 뉴타운 사업은 올해부터 본격화된다. 올해부터 2011년 사이에 26개 뉴타운 지구 내에서 관리처분인가에 따라 철거되는 주택은 12만 채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용산4구역과 같이 사업이 추진 중인 도시환경정비구역도 45개 지구에 이른다. 이에 따라 조합과 철거민들의 갈등의 불씨는 언제든 점화될 수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1일 “정부에 도시정비 법령 개정을 건의하고 재개발과 관련된 문제점에 대한 종합개선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시는 그 일환으로 재개발지역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비를 일부 보조하는 등 공공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 재개발 속도 조절 필요

현재 서울시내에서는 26개 뉴타운 지구 내 152개 구역이 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사업구역 면적은 1277만 m²로 1973년부터 지난해까지 36년간 지정된 전체 재정비구역 면적의 66%에 달한다. 철거 작업이 시작돼 이주 수요가 발생하는 관리처분인가구역은 내년엔 48개, 2011년에는 73개나 된다.

서민주택이 급격히 줄어드는 문제점을 서울시도 인식하고 있다. 서울시 주거환경개선 정책자문위원회(자문위)는 15일 뉴타운사업을 5대 권역별로 나눠 나머지 모든 주거환경 정비사업과 통합 추진해 ‘속도 조절’을 하도록 서울시에 제안했다.

하지만 단순히 사라지는 주택에 맞춰 공급을 늘리는 수준의 속도 조절은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정비사업 전후로 주택가격이 급등하기 때문이다. 자문위에 따르면 정비사업 전 월평균 207만 원을 가진 사람이면 거주할 수 있던 주택이 뉴타운이 건설되면 월 653만 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비사업 전 4000만 원 이하 전세주택 비율은 83%이지만 정비 후에는 한 채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사업지구 내에 살던 많은 사람이 쫓겨날 수 있다는 얘기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단순히 멸실(滅失)량과 공급량을 맞추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거주자의 삶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전체 사업의 속도를 늦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사업 방식에 공공성 도입해야

정비사업의 시행 주체가 대부분 민간사업자인 점도 원주민이나 세입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소다.

조합의 자금조달능력이 떨어지다 보니 시공을 맡는 민간사업자가 사업 추진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사업기간이 길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법적인 요건만 충족되면 강제철거 등으로 사업을 빨리 진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울시나 구청 등 행정기관은 인·허가를 해주고 난 뒤에는 사실상 이들을 통제할 수단이 없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행 법령상 사람들 사이의 금전 계약적인 관계에 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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