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쿵푸 팬더

  • 입력 2008년 9월 8일 02시 54분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들은 혹시 천재가 아닐까요? 뚱보 판다곰이 우여곡절 끝에 쿵푸의 고수가 된다는 단순하고 허황된 이야기, 여기에다 동서양의 철학을 종횡무진하는 깊고 멋진 문제의식을 담아내다니 말이지요. ‘슈렉’으로 유명한 미국 드림웍스사가 내놓은 ‘쿵푸 팬더’는 보는 이의 눈높이에 따라 다양한 층위(層位)의 만족감을 안겨주는 걸작 애니메이션입니다. 유머와 감성과 액션 자체로도 관객을 120% 매료시키는 이 영화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린 놀라운 성찰과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지요. 뚱뚱이 판다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겠느냐고요? 아닙니다. 아마 이 영화 속에 숨은 철학적 깊이를 속속들이 알게 되면, 여러분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걸요.》

‘거스르지 말라 또한 개척하라’

운명의 두가지 주문

[1] 스토리라인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국수가게에서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뚱보 판다 ‘포’. 어느 날 포는 쿵푸 최고수가 되는 비법이 적힌 ‘용(龍)의 문서’를 전수받을 ‘용의 전사’를 뽑는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평소 흠모하던 ‘무적의 5인방’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경기장을 찾은 포. 그런데 그에겐 청천병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쿵푸 대사부인 우그웨이가 포를 용의 문서의 전수자로 점찍어버린 것이지요!

무적의 5인방을 키운 시푸 사부는 우그웨이 대사부의 결정을 믿지 않습니다. 게으른 뚱보에다가 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 한심한 판다가 장차 용의 전사가 될 운명이라니….

바로 이 때,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악당 타이렁이 수많은 코뿔소 간수를 물리치고 탈출한 것이지요.

용의 문서를 손에 넣기 위해 마을로 달려오는 타이렁. 그를 막을 사람은 오직 뚱보 판다 포뿐입니다. 하지만 포가 그런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쿵푸 최고수가 되기 위해 용 문서를 열어본 포는 화들짝 놀라고 맙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 영화엔 정말 기묘한 장면 하나가 나옵니다. 우그웨이 대사부는 어느 날 ‘악당 타이렁이 감옥을 탈출해 마을로 돌아온다’는 예언을 시푸 사부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시푸 사부는 타이렁이 갇힌 감옥에 ‘쉥’이라는 오리를 전령사로 급히 보냅니다. “타이렁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오리 전령사의 몸에서 우연히 떨어져 나온 깃털 하나가 타이렁의 손에 들어가고, 타이렁은 이 깃털을 열쇠 삼아 쇠사슬을 끊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여기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이렁이 탈출한다는 예언을 우그웨이 대사부가 하지 않았더라면 오리 전령사가 감옥으로 가 깃털을 떨어뜨리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러면 타이렁이 탈출하는 불상사도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영화 속에 숨은 철학적 사고의 핵심을 비껴나가도 한참 비껴나간 겁니다. 우그웨이 대사부가 입버릇처럼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다네. 복숭아씨앗을 심으면 복숭아가 열리지. 아무리 다른 노력을 하더라도 이런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그렇습니다. 우그웨이 대사부가 던지고자 했던 화두는 바로 ‘운명’,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순리(順理)’였습니다. 타이렁이 감옥에서 탈출할 운명이라면, 이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우그웨이 대사부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란 없네. 다만 소식이 있을 뿐이지”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소식은 그 자체로 운명이기에,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지요.

세상의 이치, 즉 순리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부질없는 몸부림 탓에 사람들은 절망하고 좌절한다는 것이지요. 악당 타이렁도 마찬가집니다. 쿵푸 최고수가 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역행하려 했던 타이렁도 결국엔 운명의 쓴맛을 볼 뿐이지요.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흘러가는 물에 몸을 맡기듯 순리에 따른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한 용의 전사요 쿵푸 최고수라고 영화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더 깊이 생각하기

당연히 많은 분이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아니, 그럼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라니…. 그러면 인간에겐 도전과 의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더 확장해 보세요.

쿵푸 최고수가 되는 모든 비법이 깨알같이 적혀 있을 줄로만 알았던 용의 문서. 하지만 주인공 포가 열어본 용 문서에는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매끈한 백지를 통해 포의 넓적한 얼굴만이 반사될 뿐이지요. 이윽고 포는 용 문서에 담긴 비밀을 깨닫습니다. 최고수가 되는 비법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임을,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임을 말이지요.

우그웨이 대사부의 예언대로 포는 그 뚱뚱한 몸과 게으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용의 전사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가 이런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용의 전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용의 문서가 주는 깨달음대로, 특별한 비법이란 없었어요. 용의 문서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을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나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는 것만이 용의 전사가 되는 ‘아주 특별한’ 방법이었지요. 포와 타이렁의 결투 장면에서, 포가 출렁거리는 자신의 배로 악당 타이렁이 날린 주먹의 엄청난 충격을 거짓말같이 ‘흡수’해버리는 장면은 용의 문서에 담긴 진리가 고스란히 실현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포는 뚱뚱한 몸을 책망하거나 바꾸려 하는 대신, 그런 자기 몸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활용함으로써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결국 운명이란, 받아들이는 동시에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또 개척해야 하는 대상이지요.

[4] 이 장면 이 대사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린 다가올 운명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니 운명에 역행할 수도, 운명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런 ‘평범한’ 우리를 위해서 영화는 진정 멋진 대사를 남기고 있습니다. 우그웨이 대사부는 실의에 빠진 포에게 이런 말을 들려줍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버렸고(Yesterday is history), 내일은 아직 알 수 없기에(Tomorrow is a mystery), 오늘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네(Today is a gift). 그래서 우린 ‘지금’을 ‘Present’(‘선물’이란 뜻과 ‘현재’란 뜻을 모두 갖고 있는 단어)라고 부르지….”

그렇습니다. 어제는 지나간 과거이고, 내일은 알 수 없는 미래입니다. 그러니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하늘이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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