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과거사위 '삼청교육대' 진상조사 상세 내용

  • 입력 2006년 11월 10일 16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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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이하 과거사위)는 10일 80년대 초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삼청교육대의 설치 배경과 이 과정에서의 인권유린 행위 등이 비교적 상세히 드러났다.

항목별로 정리한 과거사위의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주요 조사결과다.

◇삼청교육대 창설 배경

신군부 세력은 '10·26 사건' 이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1980년 5월 31일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국보위를 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신군부는 '국민적 기대와 신뢰를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사회정화' 작업을 추진했고 이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

신군부는 당시 폭력배가 난무하고 사회질서가 혼란해 일반 국민이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집중 홍보했다.

또 국민이 폭력배 등 사회악이 일소된 깨끗하고 정의로운 새 시대를 갈망하고 있으며 이런 여망에 따라 국보위가 과감한 사회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권한을 남용해 '사회 개혁작업'을 추진했고 5·16 쿠데타 직후의 '국토건설단'을 참고한 점 등을 들어 신군부가 정권창출 및 이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과거사위는 '국보위 상임위가 국무회의나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대통령의 권한을 무력화시킨 것은 국헌문란에 해당하고, 폭동행위(10·26)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는 내란행위'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삼청교육대 사건은 공직자 숙정이나 언론인 해직 및 언론 통폐합과 함께 '내란죄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삼청계획' 누가, 어떤 절차로 입안했나?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만기는 5·16 쿠데타 직후 설치된 국토건설단을 참고해 1980년 7월10일경 실무 간사인 서완수 등과 함께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을 입안했다.

같은 해 7월28일 김만기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삼청계획 5호'에 대한 재가를 받은 후 이튿날 이를 계엄사령부에 하달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같은 해 8월 4일 '삼청계획 5호'에 따라 '계엄포고 13호'를 발령해 불량배를 일제히 검거하도록 지시했다.

'삼청계획 5호'는 입안 과정에서 국무회의에 부의됐어야 하지만 이를 거치지 않고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는 삼청계획을 입안하고 전반적인 조정, 통제 업무를 담당했으며 계엄사령부에는 내무부와 법무부를 지휘·감독해 불량배 검거와 분류 심사를, 전후방 각 부대에는 피검거자를 수용해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 등을 시행하도록 했다.

◇검거 및 분류심사

계엄사령부의 '계엄포고 13호'에 따라 80만 명의 군과 경찰이 투입돼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총 6만755명이 법원의 영장 발부 없이 검거됐다.

국보위는 당시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사범' 등을 검거 대상으로 분류했다.

검거된 6만755명은 시·군·구 관할 경찰서 단위에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 분류심사를 통해 A, B, C, D 등 4등급으로 분류됐다.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조치를 각각 받았다. B, C 급 등 순화교육 대상자는 입소한 군부대에서 재분류 심사를 받기도 했다.

전체 6만755명의 피검자 가운데 3252명은 재판에 회부됐으며 1만7761명은 훈방 또는 환자로 분류됐으며 3만9742명은 순화교육 대상으로 삼청교육을 받았다.

전체 피검자 가운데 35.9%가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는 달리 전과 사실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 무분별한 검거가 자행됐음을 반증했다.

또 1980년 8월 4일 '계엄포고 13호'가 정식 발령되기 사흘 전인 8월1일부터 일제 검거가 사실상 실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B, C급 3만9742명 전후방 군부대서 '순화교육' 받아

이른바 '순화교육'은 B, C급으로 분류된 3만9742명을 대상으로 1980년 8월 4일부터 이듬해인 1981년 1월 21일까지 전후방 26개 군부대에서 11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교육 기간은 4주를 원칙으로 했지만 '죄질이나 개전 가능성' 등에 따라 2주 훈련 후 조기퇴소를 시키기도 했다.

교육 내용은 주로 고된 체력훈련으로 유격체조, 기초 장애물 극복, 땅에 착지하는 '공수 접지훈련' 등을 위주로 실시됐다.

이 과정에서 구타와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얼차려가 빈번하게 이뤄졌고 특히 지시 불이행이나 태도불량자 등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치된 특수교육대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학생 및 여성도 순화교육

3만9742명의 순화교육 대상자 가운데는 학생 980명과 여성 319명도 포함됐다. 특히 학생 가운데는 중학생도 최소한 17명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당시 문교부로부터 통보받은 '학생 불량배'에 대해서도 전원 순화 교육을 받도록 했다는 내무부의 공문을 근거로 당시 문교부가 학생 입소 대상자를 선별해 내무부에 통보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문교부가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는 데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얘기다.

여성의 경우 1차 입소자 273명은 3주간에 걸쳐서, 2차 입소자 46명은 2주간에 걸쳐서 순화교육을 받았으며 이 가운데 전과가 없는 입소자도 217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봉사 및 보호감호

순화교육 대상자 가운데 '미순화자'로 분류된 1만16명에 대해 1980년 9월 8일부터 사회보호법에 따른 보호감호 처분 결정 시점인 1981년 1월 16일까지 총 9차례에 걸쳐 전방 20개 사단에서 근로봉사하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근로봉사 대상자들은 주로 도로 보수, 진지 구축·보수 공사, 자재 운반, 통신선 매설 작업 등에 투입됐다.

당시 국보위와 계엄사령부는 근로봉사의 불법성을 피하기 위해 대상자들로부터 '지원서'를 제출받았으며 지급받은 노임으로 식비 등 소모품을 구입하도록 하기도 했다.

특히 순화교육 때와 마찬가지로 구타와 얼차려가 자행됐고 태도 불량자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교육대를 운용하기도 했다.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이른바 '순화 불능자'에 대한 사회격리 대책으로 1980년 12월 18일 사회보호법이 제정됐다.

사회보호법 부칙 제5조 1항에 따라 군부대에 수용돼 있던 8187명과 경찰에 유치돼 있던 2101명 등 총 1만288명이 사회보호위원회의 보호감호 심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7578명이 1년에서 최고 5년까지의 보호처분을 받았다.

보호감호자에 대해서도 혹독한 체력훈련과 강제노역이 계속돼 다수의 환자 및 도주사건이 발생했다.

5, 11, 15, 27사단 등에서는 감호생들이 장기수용 등에 대한 불만으로 집단소요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하사관 1명과 감호생 3명이 사망했다.

◇퇴소자 지속 관리… 자료 범죄수사에 활용

삼청교육을 받고 사회한 복귀한 이후에 피해자들의 제반 기록은 경찰로 인계됐다.

당시 치안본부는 지속적인 보호관찰과 수사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삼청교육 관련 기록을 전산화하고 1982년 1월 15일부터 1988년 6월 28일까지 이를 범죄수사에 활용했다.

또 일선 행정기관은 내무부의 지시에 따라 동·면사무소 별로 순화교육 이수자 사후 관리기록카드를 작성해 관찰을 계속했으며 이사를 할 경우 전입 동·면사무소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퇴소자를 관리했다.

◇54명 이외 추가 사망자는…?

그동안 삼청교육 기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54명 외에 추가 사망자 는 확인되지 못했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 도중 도주했다 검거되지 않은 인원과 실종자 등을 중심으로 추적 조사를 벌였다.

도주자 108명중 검거되지 않은 인원은 15명으로 나타났지만 이들 중 2명에 대해서는 인적사항을 확인하는데 결국 실패했고 나머지 13명도 적어도 삼청교육 기간에는 사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망자 54명… 일부 사인 조작 가능성 제기

과거사위는 자살이나 병사(病死) 등으로 발표된 기존 사망자의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자살로 발표된 김정호 씨의 경우, 1980년 8월 7일 사건 초기에는 폭행치사 사건으로 보고됐지만 같은 달 12일 보고서에는 자살사건으로 사인이 변경됐다.

과거사위는 이에 대해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사망한 한상호, 신동훈, 유치일 씨 등도 병사로 발표된 것과는 달리 폭행 등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과거사위는 "사망자 상당수에 대해 사망경위와 사망원인이 조작·은폐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전문적이고 조사권한이 있는 국가기관에 재조사를 의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체처리소각장 의혹은…?

삼청교육 피해자 단체인 '삼청교육대인권운동연합'(삼인련) 등은 그동안 한탕강변에 사망한 피해자들을 소각하는 사체처리소각장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과거사위는 그러나 인근 부대에서 감호를 받았던 피해자,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일대 주민, 당시 제보자 등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지만 사체처리소각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각종 불법 및 인권유린 자행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 설치 자체는 물론 교육 과정에서 각종 불법과 인권유린이 자행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삼청교육의 근거가 된 '계엄포고 13호'는 국무회의에 부의 없이 시행돼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며 그 자체도 군사상 필요와 무관하게 불량배 소탕을 목적으로 발령된 만큼 적법한 근거가 없이 시행됐다고 지적했다.

또 검거 대상을 정한 국보위 지침이 불명확하고 추상적이어서 헌법에서 규정한 죄형 법정주의를 위배했을 뿐만 아니라 영장 없는 불법구금이 자행됐다.

근로교육이나 근로봉사 역시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처벌과 강제노역에 해당하는 위법행위이며 교육 과정에서도 구타와 얼차려 등이 상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보호감호 처분도 검사의 감호청구와 법원의 판결이라는 사법적 절차와 판단이 무시되고 사회보호법 부칙 조항에 의해 처리됨으로써 피해자들의 재판받을 권리와 사법권이 침해됐다.

피해자들이 사회에 복귀한 이후에도 경찰 관계기관의 사후 감시·관리가 이뤄져 사생활의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이 침해됐다.

디지털뉴스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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