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일부 병사자 및 자살자 사인 조작 가능성

  • 입력 2006년 11월 10일 16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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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국방부 기자실에서 열린 군과거사위의 삼청교육대 조사 결과  발표에서 강경선 위원이 조사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
10일 오전 국방부 기자실에서 열린 군과거사위의 삼청교육대 조사 결과 발표에서 강경선 위원이 조사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
10일 1980년 신군부의 대표적 인권유린행위인 '삼청교육대'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조사 결과 '순화 교육'을 위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은 중학생 17명을 포함, 980명이 학생이었고 여성 입소자도 319명에 이른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

또 순화교육이란 미명 아래 가혹 행위 등으로 숨진 일부 사망자의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이하 과거사위)는 10일 이 같은 내용의 삼청교육대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 결과 자살로 발표된 고(故) 김정호 씨의 경우 1980년 8월 7일 폭행치사로 최초 보고됐으나 5일 뒤 보고서에는 자살로 변경돼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병사처리된 고(故) 한상호, 신동훈, 유치일 씨도 폭행 등에 의해 숨졌을 것으로 판단됐다.

과거사위는 "전체 사망자 54명 가운데 67%에 이르는 병사자 36명의 사망원인에는 사망 과정과 법의학적 판단에 상당한 의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사가 극히 미진했다"고 밝혀 모든 사망자에 대한 정확한 사인 규명 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삼청교육 기간(1980.8.4~1981.12.5) 숨진 54명 외 추가 사망자는 없으며 '삼청교육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접수된 실종자 대부분은 군부대 퇴소 후 가출 또는 사망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1988년 당시 평화민주당이 삼청교육 관련 실종자로 신고한 9명 가운데 8명은 관련 자료나 증언이 없어 조사가 불가능하고 천모 씨의 경우는 1991년까지 생존한 사실이 확인됐다.

삼청교육 피해자 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사체처리소각장의 존재 여부와 관련해서는 인근 부대 감호 피해자와 경기 연천군 전곡리 주민들의 증언, 법무부 보호감호생 명부 등을 확인했으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과거사위는 밝혔다.

삼청계획은 1980년 7월 10일경부터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장 김만기 주관으로 실무간사 서완수 등이 5·16 군사정변 직후 조직된 국토건설단을 참고해 만든 '불량배 소탕계획(삼청계획 5호)'이 모태가 됐다.

이 계획은 그해 7월 28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거쳐 29일 계엄사령부에 하달됐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8월 4일 계엄포고 13호를 발령해 불량배 일제 검거를 지시했다.

계엄사령부는 내무부와 법무부, 문교부를 지휘 감독해 검거 및 분류 심사하도록 했으며 전·후방 각 부대에 이들을 수용, 순화교육과 근로봉사를 강요했다.

계엄포고 13호에 의해 군·경 연인원 80만 명이 동원돼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6만755명이 영장 없이 검거됐으며 이 중 죄를 지은 경력이 없는 사람이 36%나 돼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여성 입소자 319명 가운데 전과가 없는 사람은 217명에 이르렀다.

더욱이 포고령 발령 이전인 8월 1일(일부지역 7월 31일)부터 검거가 시작됐으며 경찰서에 장기간 유치되거나 불기소처분자 또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자를 다시 분류 심사해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킨 불법적 사례도 상당수 드러났다.

합동수사본부가 일부 노조간부를 연행 조사한 뒤 군부대로 보냈으며 노조활동을 계속하면 삼청교육대에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수법으로 노조활동을 탄압한 사례도 있었다.

순화교육은 B, C급으로 분류된 3만9742명을 대상으로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11차에 걸쳐 실시됐으며 유격체조, 공수 훈련, 얼차려 등 구타와 육체적 고통을 동반한 혹독한 교육으로 진행됐다.

순화교육 대상자 중 미순화자로 분류된 B급 1만16명은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돼 진지 구축, 통신선 매설 등 '근로봉사'에 투입됐고 강제로 지원서를 받아 위법성을 피하려한 정황도 드러났다.

1만288명이 보호감호 심사를 받고 이 중 7578명이 1~5년간 보호감호 처분됐다.

5, 11, 15, 27사단에 수용된 감호생들은 혹독한 육체훈련과 강제노역을 견디다 못해 집단반발했고 이 과정에서 하사관 1명과 감호생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삼청교육을 마친 사람들은 전과를 말소하고 갱생의 기반을 마련해 주겠다는 애초 약속과 달리 기록이 전산화돼 범죄수사에 활용됐고 동·면사무소에서도 이들을 관리했다.

삼청계획 5호는 국책사업이므로 국무회의에서 토의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국헌 문란' 행위에 해당한다고 과거사위는 결론을 내렸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공직자 숙정이나 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과 함께 내란죄의 일부분으로 판단되며 이 교육 입안에 정권 창출 및 정당화라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과거사위는 판단했다.

과거사위는 또 적법한 근거 없이 시행된 삼청교육은 반인간적인 가혹행위이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 위법행위로 사망자에 대한 국가기관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사위는 "피해자가 겪고 있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실태 조사와 적절한 의료대책이 필요하다"면서 "정부 차원의 공개 사과와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편 과거사위는 국방부, 법무부, 국가기록원, 국회 등에서 보유하고 있는 관련 문서 8만3242 쪽을 수집해 조사했으나 삼청교육 관련 국보위 회의록과 삼청교육대 전체 입·퇴소자 명단 등의 보존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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