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벨 안 울려 불 난 줄도 몰랐다”

  • 입력 2006년 7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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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1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 화재 현장에서 동네 주민들이 사다리에 올라가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다. MBC TV화면 촬영
아슬아슬
1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 화재 현장에서 동네 주민들이 사다리에 올라가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다. MBC TV화면 촬영
주인은 어디 가고…19일 오후 3시 50분경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에서 불이 나 이 건물 3, 4층에 있는 N고시텔 거주자 8명이 숨지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화재 진압 후 한 소방관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남아 있는 불씨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 송파소방서
주인은 어디 가고…
19일 오후 3시 50분경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건물에서 불이 나 이 건물 3, 4층에 있는 N고시텔 거주자 8명이 숨지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화재 진압 후 한 소방관이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남아 있는 불씨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울 송파소방서
화재로 8명이 숨진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은 이름만 고시준비생을 위한 고시원이지 대부분의 거주자가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취업준비생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밤에 잠만 자러 이곳에 들르는 탓에 건물의 전체 구조나 화재 시 대피경로 등을 사전에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쪽방 고시원=지상 4층짜리 건물 중 고시원은 3, 4층에 있었다. 34개 방이 있는 3층은 여성들이, 36개 방이 있는 4층은 남성들이 이용했다. 도로 쪽으로 창문이 난 방은 한 달에 23만 원을, 복도 쪽으로 창문이 난 방은 한달에 22만 원을 받았다. 이곳은 애초에 사무실로 쓰였으나 2년 전부터 고시원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하지만 남성들이 있는 4층에는 고시준비생이 거의 없었다고 고시원 거주자들은 말했다. 대부분 인근 재건축 공사장 인부들이었다는 것. 여성이 있는 3층 역시 고시생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준비하거나 인근 업소 종사자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불이 난 줄도 몰랐다”=이 건물에 불이 나자 1층 식당에 있던 사람들과 2층 건축회사 사무실의 직원들은 신속하게 대피했다.

하지만 고시원 거주자들은 대부분 불이 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화재 비상벨이 울리지 않은 데다 밀폐공간인 고시원 방에서는 연기를 감지하기도 힘들었다.

3층 고시원에 있었던 조모(23·여) 씨는 “누군가가 ‘불이야’라고 외쳐 방문을 열어 보니 이미 연기가 복도에 가득했다”고 말했다.

조 씨는 고시원에서 수개월째 생활하고 있었던 덕에 복도에 난 창문을 쉽게 찾았고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그는 2층의 유리지붕으로 떨어져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시원 거주자는 한꺼번에 좁은 계단 쪽으로 몰려갔다. 계단은 이 건물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아래층에서 올라온 연기는 ‘연통’ 역할을 한 계단 쪽으로 솟아올랐고 이들은 연기 속에 갇혀 질식했다.

N고시텔에서 7개월째 생활한 이모(31) 씨는 “계단은 어른 2명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며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더라도 대피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다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옥상의 출입문이 열려 있었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거주자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N고시텔에는 소화기와 스프링클러가 아예 없었고, 대피기구인 완강기는 있었으나 작동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팔 걷어붙인 시민들=불이 나자 인근 건물의 시민들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그나마 희생자를 줄였다.

옆 건물에서 살고 있는 김병구(48) 씨는 “이상한 냄새가 나 뛰쳐나와 보니 불길이 3, 4층으로 번지고 있었고 3층 창문에서 많은 여성이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인근 상인 4명은 공사장에서 가져온 사다리 2개를 이어 붙여 3층까지 연결하고 창문을 통해 여성들을 구조했다.

김 씨는 “3명의 여성은 무사히 구했지만 한 여성이 연기를 많이 마신 탓인지 의식을 잃고 떨어져 크게 다쳤다”고 말했다.

숨진 8명의 시신은 서울의료원(3명), 서울아산병원(2명), 경찰병원(2명), 삼성서울병원(1명)에 안치돼 있다. 사망자 중 장수진(22·여) 씨는 N고시텔에 거주하지 않았으나 이날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은 화재 신고가 들어온 지 3분 만에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에 의해 27분 만에 진화됐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지하1층 노래방서 발화… 방화 가능성 수사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의 화재 원인을 놓고 경찰은 방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8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치는 등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는 점에서 경찰은 화재원인의 철저한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화재 현장을 목격한 인근 주민 상당수가 화재 당시 기름 냄새가 많이 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인화성이 강한 물질을 이용한 방화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목격자들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났다고 말해 누군가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 송파경찰서는 가장 먼저 불이 난 이 건물 지하 1층 노래방의 업주 정모(52) 씨를 불러 사고 경위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정 씨는 경찰에서 “누구도 불을 지르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노래방 카운터가 심하게 그을린 점으로 미뤄 이곳을 최초의 발화지점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정확한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20일 오전 10시 현장감식에 나선다.

경찰은 이 밖에도 최근에 장맛비가 계속 내린 점에 비춰 습기가 많이 찼을 것으로 보이는 지하층에서 누전이 발생해 불이 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이번에도 ‘예견된 참변’

1, 2평 남짓한 쪽방이 수십 개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시원은 오래전부터 ‘대형 참사’의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8명이 한꺼번에 숨진 19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N고시텔 화재 사고 역시 고시원이 화재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미로 같은 좁은 통로와 환풍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고시원 건물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참사였다.

소방법상 화재가 났을 때 다수의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업종은 다중이용업소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다중이용업소 중에서도 고시원은 화재에 가장 취약한 곳으로 꼽혀 왔다.

좁은 방 안에 전기장판이나 컴퓨터 등 각종 가전제품이 밀집해 있는 데다 이불 같은 불에 타기 쉬운 소재가 많기 때문. 하지만 예전의 소방법에서는 고시원을 비롯한 다중이용업소에 대한 뚜렷한 소방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방재시설이 미비했던 2004년 1월 경기 수원시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 4명이 숨졌는가 하면 지난해 12월에는 서울 마포구의 한 고시원에서 불이 나 20대 여성이 숨지는 등 고시원 화재 사고가 잇따랐다.

정부는 2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5월 30일부터 다중이용업소에 대한 소방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불이 났을 때에 대피할 수 있는 비상구를 가로 75cm, 세로 150cm 이상으로 규격화했고 비상구를 만들지 못할 때에는 발코니를 따로 설치하도록 했다.

또 실내 장식물에 불연재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했고 방마다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했다. 완강기와 같은 피난기구를 갖춰야 하며 스프링클러 설치도 의무사항이다.

이번에 화재 사고가 난 N고시텔도 3개월 전에 방 사이의 칸막이를 합판에서 단열재로 교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상 대피로는 제대로 확보돼 있지 않았고 어김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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