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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10일 20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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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닐곱평 남짓한 대기실은 신년 사주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방에선 43세의 여성 김모씨가 가족들의 사주를 보고 있었다.
“부군(43세)께선 지난해 운세가 좋지 않았군요. 올해부터 조금씩 풀릴 텐데 그래도 흉터를 조심하세요. 47세가 되면 재물운이 살아납니다.”(K원장)
“4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고요? …딸애가 E대와 H대에 원서를 냈는데….”(김씨)
“E대는 어렵습니다. 올해 남자가 좀 꼬일 텐데 가능하면 사귀지 말라고 하세요. 혼사는 스물일곱을 넘기는 게 좋겠고….”(K원장)
“제가 가게를 2년 전에 내놨는데 통 팔리질 않네요.”(김씨)
“4월에 나갈 겁니다. 그리고 동업은 하지 마세요.”(K원장)
새해를 맞아 운명철학관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다. 서울의 미아리, 동대문, 동부이촌동, 금호동, 테헤란밸리, 탑골공원 옆, 로데오거리, 대학가….
사주 보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들여다보면 세태의 변화가 감지된다. K원장의 말.
“예전엔 인생의 큰 운명을 궁금해했지만 요즘엔 코앞에 닥친 문제를 알고 싶어합니다. 명예보다 재물에 관심이 커졌고, 자녀가 연예계로 나가면 성공할 수 있을지를 묻는 부모도 많죠. 과거엔 생긴 대로 산다고 했지만 요즘엔 외모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외도’다. K철학원을 찾는 기혼 여성의 30% 이상이 바람 피우는 문제로 운세를 보러 온 사람이라고 한다.
같은 날 오후 5시 강남구 역삼동의 S철학원. 마침 한 중년 남성이 사주를 보고 돌아갔다. 대표 N씨에게 사연을 묻자 “부인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 걱정이 돼서 온 분”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사실 저분의 부인이 며칠 전 찾아와 딴 남자를 계속 만나도 좋은지 운세를 보고 갔다”고 귀띔했다.
이곳은 테헤란밸리의 특성도 잘 보여준다. N대표에 따르면 1, 2년 전엔 벤처 투자와 주식투자 운세를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엔 작지만 실질적인 것들을 궁금해한다. ‘대박의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같은 날 오후 7시, 이번엔 사주카페 30여곳이 성업 중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한 사주카페를 찾았다. 카페는 20대 젊은이들로 꽉 들어찼고 역술인 3명이 자리를 옮겨가며 사주를 봐주고 있었다. 손님들의 관심 사항은 주로 애인과 진로 문제였다.
하지만 20대 젊은이들에게 사주보기는 일종의 유쾌한 놀이나 다름없다. 방학을 맞아 귀국한 미국 뉴욕대의 김모(21) 한모씨(21)는 “맞으면 좋고, 틀려도 그냥 좋은 추억이죠”라면서 깔깔 웃었다.
사주를 본 사람들 중 누구는 기대에 부풀기도 하고 누구는 수심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날 만난 역술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너무 사주에 의존하지 말라. 좋다고 경거망동할 일도 아니고 나쁘다고 절망할 일도 아니다. 사주는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고 피흉취길(避凶取吉·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은 취함)의 지혜를 배우는, 즐거운 활인법(活人法)이 되어야 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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