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政 의약분업 정면충돌]의료수가 조정 앞두고 신경전

  • 입력 2002년 10월 31일 18시 20분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 정부는 최근 '의약분업이 성공적이다', '동네의원 수입이 크게 늘었다', '의원의 부정청구가 여전하다'는 등의 보도자료를 잇따라 내놓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조와 시민단체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의료계는 정부의 '의사 죽이기'가 다시 시작됐다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의료수가 결정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정면충돌 조짐마저 보이는 양상이다.》

▽갈등 심한 의정(醫政)=대한의사협회 주수호(朱秀虎) 공보이사는 3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주는 정부와 시민단체가 정한 '의사 죽이기 기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의료계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정부 등의 자료가 잇따라 발표된 데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 실제로 '의약분업 이후 의원의 진료비 수입 대폭 증가'(10월 28일, 보건복지부), '동네의원의 진료왜곡 심각'(30일, 복지부), '동네의원 월평균 부당청구 102건'(30일, 전국사회보험노조) 등의 자료가 나왔다.

의협은 무리한 의약분업 실시와 그에 따른 보험재정 파탄의 책임을 의료계로 돌리는 의도라고 불만을 나타냈다.

의정 양측이 이렇게 대립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약계 대표가 15일까지 의료수가를 계약해야 하는 데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어 지금이 의약분업 유지 또는 재검토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

의협의 일부 지부에서는 "대선을 앞둔 지금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투쟁의 적기이기 때문에 신속하고도 즉각적인 행동에 들어갈 지침이나 결의를 내려달라"고 집행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분업을 보는 시각=의정 갈등은 2000년 7월부터 시행된 지금의 의약분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다른데서 출발한다.

정부는 의약분업의 일부 문제점을 보완하면 된다고 강조하지만 의료계는 즉시 중지하고 전면 재검토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약사의 임의조제는 의사들이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 분업 시행으로 거의 없어졌다는 정부 평가에 대해 의료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다.

예방의학 및 보건경제학자들이 만든 '의약분업 정책평가연구회'는 최근 "전국 196개 약국을 대상으로 임의조제 여부를 조사한 결과 92.9%가 임의조제로 간주될 수 있는 응답을 해 임의조제 관행이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의료수가 공방=복지부는 분업 후 의료기관의 수가 분업 전보다 12% 늘고 올 상반기 동네의원 당 월평균 진료비가 2년 전보다 39.6%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의료수가를 인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건강연대 경실련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31일 공동 성명을 통해 "내년도 의료수가와 보험료율을 정하는 재정운영위원회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수가를 인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거들었다.

이에 대해 의협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서울시립대 박정우 교수팀과 삼일회계법인의 연구 결과 정부의 재정절감 대책으로 경영난이 악화돼 오히려 수가를 15% 이상 올려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반박했다.

올 상반기 전국 101개 의원의 경영 현황을 진단했더니 조사 대상의 40%가 세금공제 뒤 순이익이 500만원 이하로 나타났다는 것.

이처럼 재정대책과 의료계 수입에 대한 의정 양측의 의견이 극과 극이어서 기한 안에 수가 조정에 합의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의료수가 결정 절차: 1일부터 열리는 건정심이 진료비 지급기준인 '상대가치 환산점수'를 개정하면 이를 토대로 건강보험공단과 의약계 대표가 15일까지 수가를 계약하도록 국민건강보험법에 규정돼 있다.

그러나 양측이 수가 조정에 합의하지 못하면 다시 건정심이 수가인상안을 논의하고 여기에서도 합의가 안되면 최종적으로 24명의 위원이 투표로 결정한다. 건정심에는 의약계 노동계 사용자 보험공단 시민단체가 참여한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수가정책 "오락가락"▼

'동네의원 진찰료는 적정 수준보다 8.7% 높고 병원 입원료는 24.4% 낮다.'

보건복지부의 의뢰로 연세대 의대, 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경영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해 최근 발표한 '건강보험 상대가치 연구' 결과이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는 이 자료를 토대로 진료비 지급기준이 되는 '상대가치 환산점수'를 개정하고 의료수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진찰료는 인하되고 입원료는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복지부 김강립(金剛立) 보험급여과장은 "내용은 간단하지만 파괴력은 엄청나다"고 평가했다. 진찰료 인하와 입원료 인상이 동네의원의 경영과 환자 부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료수가가 원가에 못 미친다며 동네의원의 진찰료를 올린 것이 불과 2년 전이라는 점. 2000년 6월 의료계가 의약분업에 반대하며 총파업에 들어가자 정부는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수가를 2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현실화하겠다'며 진찰료를 인상했었다.

당시 시민단체가 수가 인상을 강하게 비판하자 복지부는 "연구에 따르면 수가가 원가의 8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번에 다른 연구결과를 근거로 진찰료를 내린다면 '오락가락 수가결정'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동네의원을 찾는 환자들의 부담도 마찬가지. 정부는 의약분업 직전에 진료비가 1만2000원 이하인 경우 2200원이던 동네의원 환자 부담액을 진료비가 1만5000원 이하인 경우 2200원으로 바꿨다가 지난해 7월 다시 3000원으로 올렸다.

의약분업으로 환자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본인 부담률을 18.3%에서 14.7%로 내렸다가 보험재정이 바닥나자 다시 환자 부담을 늘린 것. 복지부는 동네의원 환자 부담률을 내년에 30% 수준으로 올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내년도 수가조정은 의사 등의 집단시위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객관적 기준으로 정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그렇게 될지 의문을 갖는 국민이 많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전문가 "이렇게 풀자"▼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힘 겨루기를 하는 양상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엉터리 의약분업이 강행돼 의사와 국민 모두가 고통과 신음에 젖었다”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광고를 연일 게재하고 있다.

의협은 차기 정부의 의료정책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의약분업, 민간보험, 의료시장 개방 등 12개 항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정책질의서를 최근 각 대선후보에게 보냈다.

회원들이 투표에 참고하도록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에 맞서 정부는 “의협이 사실을 왜곡 오도한 광고를 내보내며 국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고 반박한다.

보건복지부는 현 의협 집행부가 회원 직선으로 선출돼 분업 철폐와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지만 2000년 의료계 총파업 같은 투쟁은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대선후보들이 의협의 정책 질의에 어떻게 답변할지에 대해선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의-정(醫-政) 양측이 의약분업 및 의보재정 해결 방안을 놓고 극한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정우진(鄭宇鎭·보건대학원) 교수는 “전문성과 객관성을 갖춘 인사로 범 정부 차원의 의약분업 평가기구를 만들어 득과 실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약분업으로 인한 의료비 증가와 불편은 비교적 명확한 반면 분업으로 인한 편익은 불확실하므로 의약분업 시행과 관련한 각종 정책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

이화여대 정상혁(丁相赫·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의약분업으로 보험재정이 악화된 만큼 지금의 분업을 성공적으로 보기는 힘들다”며 “보험재정을 늘리되 국민 부담을 감안해 가능한 한 완만하게 늘려야 한다”고 제의했다.

참여연대와 건강연대 등 시민단체는 “보험료 수입 증가에도 불구하고 재정 절감을 못한 것은 정부가 분명히 책임져야 하지만 수입이 늘어난 의약계가 고통 분담의 차원에서 수가 인하를 수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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