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원행원들 석별편지]『D등급 인생 자괴감 술로 달래』

  • 입력 1998년 10월 24일 20시 02분


최근 인원정리를 앞두고 D등급(최하등급)이라는 충격적인 인사고과를 받아들었던 외환은행 윤모과장.

“D등급 아들, D등급 남편, D등급 아빠, D등급 친구…, 한마디로 D등급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괴감과 아내와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사흘동안 술로 밤을 지샌 끝에 어제밤 아내와 긴 토론을 거쳐 애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은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은행 구조조정과정의 감원태풍으로 정든 직장을 떠나는 수많은 은행원들이 행내 컴퓨터통신 게시판에 남기고 떠난 편지들이 동료직원의 가슴을 때린다. 힘들었던 직장생활, 퇴직을 결심하기까지의 고뇌, 안타까운 석별의 정이 묻어나는 편지들.

“23일 아침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월급명세표를 받아들었다”는 상업은행 여직원 송모씨.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뭔지, 원망스럽다. 몇번씩 오장육부를 뒤집어놓고 끝내는 ‘망해가는 은행’이라며 정기예금을 중도해약한 손님이 길 건너편 은행으로 가는 것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면서 느꼈던 참담함, 평상시 괴로울 정도로 까다롭게 구셨어도 이때만큼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은행은 괜찮지’라며 그냥 돌아서 나가시던 손님에 대한 고마움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갑니다.”

이 은행 장모과장의 편지는 차라리 담담하다.

“긴 여정의 종착역에 내려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엄동설한에 하나님이 옷을 발가벗기실 때는 필경 더 좋은 옷을 입혀주시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어제 집사람과 두아들(중2, 초등6)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외환은행 김경민(金敬敏)이사는 떠나가는 부하들과의 석별을 아쉬워하며 컴퓨터 게시판에 시 한편을 옮겨놓았다.

“여보…. 괜스레 허전한 느낌이 자꾸만 밀려옵니다. 애써 30년전의 바다를 생각하고 있소. 당신과 내가 손을 잡고 거닐던 가난한 연인들의 바다를 떠올려보지만 그럴수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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