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적 공직임용이 국가부패 키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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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한번 뽑히면 철밥통… 민간회사 이직후엔 로비 창구
■ KDI “개방형 임용 확대해야”

199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20년 이상 한 A 씨는 2011년 민간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A 씨가 처음 한 일은 2가지뿐이었다. 오전에 회사 차원에서 회람하는 주요 인사 관련 정보 취합 서류에 A 씨가 알고 있던 내용을 추가해 주고, 오후에는 부처 후배들을 찾아가 친목을 쌓았다. 이런 생활을 1년쯤 하자 회사는 A 씨에게 ‘로비를 좀 하라’는 은근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A 씨는 “불법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고 후배 공무원들에게 특정 사안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물어보거나 가능한 범위에서 융통성을 발휘해 달라고 말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20대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끼리 오랜 기간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청탁을 거절하기 힘든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이처럼 한국의 폐쇄적인 공무원 선발 제도가 국가 부패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KDI는 9일 ‘공직 부패 축소를 위한 공직 임용제도의 개방성 확대’ 보고서에서 “외부와 단절된 공무원 임용 제도 때문에 민간 회사에 재취업한 공직자가 불법 로비를 할 여지가 커지는 등 부패 정도를 높이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공직 임용 개방성은 0.392였다. 0에 가까울수록 외부와 단절된 채 내부 조직원들끼리 자리를 나눠 먹는 폐쇄성이 강하다는 의미인데 한국의 개방성(0.392)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478보다 낮았다. 이는 낮은 직급의 공무원은 공개시험을 통해 뽑지만 고위 공직자는 미리 선발된 공무원 인력 내에서 주로 뽑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지만 한번 뽑히면 이른바 ‘철밥통’을 갖게 되는 셈이다.

한국은 2000년 1월부터 부처별로 1∼3급인 고위 공무원 가운데 20%를 개방형 직위로 배정해 외부 수혈을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방형 직위로 배정된 자리에 외국에 파견 나가 있던 사람이 외부 인사 자격으로 응모해 고위직을 차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몇 년 전 중앙부처 국장급 개방형 직위에 응모했던 B 씨는 “유럽 금융기관에 파견 나가 있던 국장급 인사가 부처 인사팀으로부터 개방형 직위 공모가 실시된다는 연락을 받고 파견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귀국해 응모하더라”며 “사실상 그 공무원을 뽑기로 내정돼 있었고 나처럼 순수 민간 인사들은 들러리를 선 셈”이라고 말했다. 개방형 직위 임용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지난해 고위 공무원 가운데 8% 정도만 민간 인사가 선발됐다.

이처럼 공직 임용 제도가 폐쇄적으로 운영될수록 국가 부패지수는 높아지고 정부 지출의 효율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과 KDI가 20개 선진국과 한국 공직 사회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공직 임용 제도는 분석 대상 국가 중 3번째로 폐쇄적이었다. 폐쇄성이 높을수록 부패 정도도 높아 한국보다 부패한 나라는 재정위기를 겪은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뿐이었다.

KDI는 인맥을 이용한 고위 공직자의 로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고위 공무원직을 민간에 개방해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호준 KDI 연구위원은 “현재 한직에 집중돼 있는 개방형 임용 제도를 중요도가 높은 자리로까지 확대 실시하고 선발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송충현·홍수용 기자 balgun@donga.com
#KDI#공직임용#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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