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은 겉핥기… 후보도 안갯속… 깜깜이 대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6일 03시 00분


민주, 안철수와 연대만 골몰… 박근혜 공약 찔끔찔끔 발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의 정책 코너로 들어가 ‘과학기술’을 클릭하면 정책공약은 없고 지난해 11월 박근혜 의원실이 주최한 세미나 자료만 나온다. ‘과학기술의 융합과 산업화를 통한 창의국가’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발제자들이 발표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그대로 올려놓은 것. 고용복지 코너에도 공약 대신 박 의원실이 지난해 11월 연 ‘국민 중심의 한국형 고용복지 모형 구축’ 세미나의 발표 자료만 올라 있다.

이에 대해 박 후보 측이 유권자에게 정책을 성의 없이 소개한다는 지적이 많다. 설사 세미나 자료에서 박 후보가 제시할 정책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해도 10개월 전에 발표된 발제자들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정책으로 구체화됐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더욱이 홈페이지의 정책 코너엔 고용복지, 과학기술을 포함해 여성, 정부3.0(정부운영), 교육 등 5개 분야만 소개돼 있다. 박 후보가 3대 핵심과제로 제시한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 확립에 대한 정책공약은 찾아볼 수 없다. 박 후보가 지난달 20일 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를 시작했음에도 집권 비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책공약 소개가 허술한 것이다.

경선을 치르고 있는 민주통합당 후보들의 홈페이지는 대체로 전 분야에 걸쳐 정책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공약 실현을 위해 어느 정도의 재원과 시간이 필요하고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 분배할지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만으로 유권자가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비교 판단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대선후보의 홈페이지는 유권자 눈높이에서 자신의 정책을 알리고, 유권자도 손쉽게 후보를 만날 수 있는 창구다. 그럼에도 이렇게 정책공약 소개가 부실한 것은 정책 선거가 실종돼 가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번 대선도 유권자들이 후보의 정책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 채 투표하는 ‘깜깜이 선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 與 정책 뭔지… 野 누가 나올지… 국민만 갑갑 ▼

여기에는 장외의 유력 대선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만드는 ‘안철수 안개’ 탓도 크다. 대선이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안 원장은 출마 여부에 대해 아직도 모호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야권은 아직 후보도 결정하지 못했다. 후보도 결정되지 않은 마당에 여권과 정책 경쟁을 벌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민주당 경선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후보는 5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안 원장과의 단일화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도 여당 후보와의 정책공약 대결이 아니라 출마 선언조차 하지 않은 안 원장과의 연대 방식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제1야당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유권자는 대선후보들이 어떤 집권 구상을 갖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에서 정책경쟁은 물 건너가고 불공정성 논란과 지도부 책임론으로 얼룩진 지 오래다. 박근혜 후보도 찔끔찔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박 후보는 7월 이후 두 달간 여성, 정부3.0, 교육 분야에서 단 3개의 공약만 발표했다. 국정 운영의 큰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정책은 감감무소식이다. 대선에서 맞서 싸울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카드를 보여줄 수 없다는 전략으로 보이지만 유권자의 검증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많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0일부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형태로 정책공약은행을 만들어 유권자들이 의견을 올릴 수 있도록 할 예정이지만 얼마나 활성화될지 의문이다. 선관위는 다음 달 20일부터 여야 후보들의 공약을 홈페이지에 게시할 예정이나 그때까지 야권의 최종 후보가 확정될지조차 불투명하다.

야권 최종 후보는 빨라야 10월, 늦으면 대선 직전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안 원장과 교류가 있는 한 정치권 인사는 “그렇다 해도 TV토론회 등을 통해 후보를 검증할 시간은 충분하다”며 여유를 부렸다.

미국은 11월 대선을 7개월이나 앞둔 4월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됐다. 이현출 국회입법조사처 정치행정조사심의관은 “대선 1년 전부터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시작되고 이 과정에서 집권 4년의 정책 비전이 정교하게 구체화된다”며 “유력하게 거론되는 후보가 나올지 안 나올지조차 애매한 한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6월 국회 강연에서 “12월 대선이 다가왔는데 후보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선거 캠페인 기간이 짧아지면서 모든 것이 숨 돌릴 새 없이 졸속으로 전개된다. 엄청난 권력을 갖는 대통령을 너무 즉흥적으로 선출한다”며 “한국 정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안 원장에 대해선 “무책임하면서 비정상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정책의 단계별 달성 시한, 소요 재원, 재원 마련 방안이 구체적으로 담긴 매니페스토(정책공약집)를 통해 정책 경쟁을 벌이는 영국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1997년 집권 뒤 매년 자신이 제시한 공약을 얼마나 성실히 이행했는지 항목별로 채점해 발표했다. 그는 “이것은 국민과의 계약”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여야는 ‘국민과의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대선#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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