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라인 강의 기적]<下>빛나는 메르켈 리더십, 성과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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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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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유혹 떨치고 복지 축소… 그녀 ‘철의 뚝심’ 獨 살렸다


《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경제는 크게 후퇴할 것이다. 실업자를 위한 연금 혜택을 늘리는 방안 같은 민심 수습책을 생각해 보자.”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로 확산되던 2009년 봄. 독일 집권 기민당의 중진 의원들이 재선 도전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마이너스 경제 성장이 예상되자 여권에서는 노동·사회개혁 정책의 속도를 늦추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지금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엄청난 규모의 긴축 예산 편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선거를 위한 포퓰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는 의지였다. 예산을 짜는 과정에서도 메르켈 총리는 연정 내 반대 세력은 물론이고 야당의 주요 인사, 노동계와 재계 대표들을 만나 “각자 조금씩 더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수없이 대화하고 설득했다. 》
○ 지도자의 안목과 정책의 일관성

메르켈 총리가 교조적으로 긴축만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2010년 독일 정부가 사상 최고 강도의 긴축 예산안 편성 작업에 들어갔을 당시 롤란트 코흐 헤센 주지사는 복지제도 축소의 일환으로 교육예산을 줄이겠다고 연방정부에 보고했다가 메르켈 총리에게 혼쭐이 났다. 메르켈 총리는 “교육비를 줄이면 독일의 미래가 있겠느냐. 공교육을 통한 숙련된 기술자 양성과 기술의 승계 없이는 독일의 위상을 지킬 수 없다”고 질타했다.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안목과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문가들은 독일 경제가 글로벌 재정위기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로 위기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던 정책의 일관성을 꼽는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민당 정권의 복지 축소에 배신감을 느낀 국민이 선거에서 사민당을 버렸지만, 그 덕분에 정권을 잡은 메르켈 정부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치고 오히려 개혁의 강도를 높였던 것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는 “연금 수령자의 연령대를 높이고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도록 기업의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아픈 개혁을 계속 밀고 나갔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이 독일을 “마법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메르켈 총리의 뚝심 리더십은 지난해 하반기 그리스 재정위기가 스페인 이탈리아로 번지면서 유로존이 붕괴 위험에 직면했을 때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책임의 공유’를 주장하며 민간 채권단을 압박해 그리스 채무 탕감을 이끌어냈다. 유럽연합(EU) 내에서 주권 간섭의 논란까지 일으킨 신재정협약도 끝까지 밀어붙였다. 25개 회원국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메르켈이니까 가능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 뚝심 리더십의 딜레마


“정치에 투신했을 때 35세였고 이후 아이를 갖는 문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나에 집중해야 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절제, 속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알려진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성장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선교를 위해 동토를 택했던 목사인 부친과 라틴어 교사 모친 사이에서 엄격하게 자란 그는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5년 집권 후 지나치게 신중한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런 배경의 산물인 셈이다.

뚝심과 안목, 대화와 설득으로 상징됐던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은 이제 마지막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타냐 뵈르첼 베를린자유대 교수는 17일 “유로존 위기 대응 과정에서 독일과 메르켈 정권의 역할이 중심이 된 것은 독일이 의도한 게 아니다. 다른 유럽 주요국의 경제, 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자 독일이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언급에는 독일을 대하는 유럽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는 함의가 있다. 유럽이 독일에 대해 경제력에 맞는 정치적 리더십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 이는 “돈만 내놓으라”는 식의 ‘이율배반적’ 태도라는 것이다.

15일 프랑크푸르트 카우프호프 백화점 앞에서 만난 직장인 와트 씨(25)는 ‘독일이 유럽 위기 해결에 방관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독일이 언제까지 다른 나라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야만 하느냐”고 말했다. 그는 “나는 전후 3세대다. 독일 국민은 더는 전쟁의 원죄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범유럽의 문제에서 독일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는 독일 청년 세대의 일반적 불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유럽 문제에서 독일의 기여와 점수가 높아질수록 내부의 메르켈 정권 지지도가 떨어지는 역설도 여기서 비롯된다. 메르켈의 딜레마다. “위상에 어울리는 책임을 지라”는 요구와 “흥청망청 살다 망한 집을 언제까지 도와줘야 하느냐”는 비판 사이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게 메르켈 총리의 현재 상황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럽 재정위기 대응 과정에서 시장이 요구하는 유로본드 발행이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확대, 유럽중앙은행(ECB)의 국채 매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3선에 도전해야 하는 그가 국내 정치를 고려해 재정 출혈을 막는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구하기가 실패하거나 유럽의 경기침체가 ‘잘나가는’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는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의 3선 목표도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독일의 장기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메르켈 정권의 큰 숙제다. 독일의 출산율은 가구당 1.3명으로 1946년 이래 최저 수준이다. 연금 수급자 증가와 노동인구의 감소는 고생산성을 바탕으로 한 현재의 성장모델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도전은 외부에도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 사태는 긴축 재정과 낮은 인플레이션, 엄격한 차입 규제로 대표되는 독일식 재정위기 해법의 승부수가 됐다.

월가의 억만장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 씨는 최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메르켈 총리를 존경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유럽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며 “유럽의 재정위기를 타개하려면 재정 감축보다는 투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반면 독일 경제연구소(DIW)의 페르디난트 피히트너 박사는 15일 “메르켈 총리는 이번 재정위기를 계기로 유로존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며 “결국 유럽은 과거보다 더 강해질 것이며 이는 유로의 미래에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프랑크푸르트=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 메르켈 총리의 업적 ::

- 전임 사민당 정권의 노동·사회개혁 정책 계승 강화
- 노사 합의에 따른 고용 및 근로시간 확대 추진
- 긴축정책 속에서도 교육, 연구개발 예산은 확대
- 수출 지원을 위해 기업의 세금, 보험료, 연금 감면
- 기업 승계 시 상속세 완화 등 경제성장촉진법 마련
- 경기 위험에 대비한 기업 간 장기 선주문 계약 대책 등 마련
-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민간채권단의 책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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