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화려했던 20년 굴곡진 5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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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국회부터 내리 5선 탄탄대로

2008년 공천탈락→당대표→6선 의장… 돈봉투 의혹으로 정치생명 위기

“내가 경제만 알았으면 대통령 했을 텐데….”

박희태 국회의장이 2007년 7월 이명박 대선후보 선거대책본부장 시절 기자를 만나 건넨 이 농담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구애를 뿌리치고 이 후보를 선택한 박 의장은 그때만 해도 18대 국회의장 자리가 손 안에 들어온 듯했다.

그러나 앞날은 알 수 없는 법. 그로부터 4년 6개월 동안 박 의장은 그때까지의 20년 정치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굴곡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당내에서 2008년 4월 총선 때 박 의장이 낙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직접 박 의장의 공천을 챙겼다. 평소 친박(친박근혜)과의 화합을 중시했던 터라 그에겐 당내 적(敵)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야당과 공천 선명성 경쟁을 하던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은 영남권 물갈이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박 의장을 공천 명단에서 배제했다.

박 의장은 훗날 “공천 탈락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그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핵심 당직자에게 비례대표 공천 가능성을 타진했다가 “지역구 공천 탈락자를 비례대표로 공천하면 원칙이 무너진다. 다른 기회가 있을 테니 기다려 보자”는 뻔한 위로를 들으며 자존심도 구겼다.

1988년 경남 남해-하동에서 당선된 이후 1993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가 동아일보 검증 보도로 딸의 대학 편법입학 의혹이 불거져 낙마한 흠집은 있었지만, 대체로 대변인, 원내총무, 국회부의장 등 탄탄대로를 걸어온 그에게 암흑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의외로 일찍 기회가 왔다. 2008년 7월 전당대회에서 친이(친이명박)계가 똘똘 뭉쳐 그를 당 대표로 옹립했다. 이후 친박계 무소속 의원들을 대거 입당시키면서 화합의 물꼬를 텄지만 원외(院外)인 탓에 ‘힘없는 관리형 대표’라는 딱지를 떼기 힘들었다.

이듬해 10월 경남 양산 재선거에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 출마하기 위해 당 대표직을 임기 도중에 버린 것. “당선이 쉬운 지역에 출마하는 건 당 대표의 도리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컸지만 그는 ‘원내 입성 후 국회의장’을 노렸다.

국회의장의 꿈을 이루고 명예로운 ‘퇴진’을 눈앞에 둔 지금, 24년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국회의장의 길에 발판을 마련해 준 2008년 전당대회가 발목을 잡은 것. 본인은 돈봉투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검찰은 물론이고 당내 압박은 그의 목을 점점 조여 오고 있다.

한 측근은 “18대 때 공천만 받았어도 2008년 전대 출마는 없었을 텐데…”라며 탄식했다. 온갖 악재도 꿋꿋하게 버텨온 박 의장이지만, 이번 위기는 버거워 보인다. 그의 나이 이제 74세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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