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公正’을 말하다]<上>가치 경쟁

동아일보 입력 2010-09-07 03:00수정 2010-09-0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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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사회, 어느 정파-계층도 피하지 못할 ‘우리 세대 숙제’ 《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국정과제로 제시한 ‘공정한 사회’가 정치권과 관가를 비롯해 우리 사회 전반에 지진해일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가 기존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이 시대의 화두로 급부상한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치 못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기 때문이다. 정파와 지역, 계층을 막론하고 ‘공정’이라는 가치를 거부하기 어려운 게 작금의 현실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압축성장을 하면서 불공정이 횡행하는 데 제대로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웠다. 먹고사는 게 급했던 탓이다. 하지만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도덕적 해이에 실망한 민심은 공정한 사회라는 새로운 어젠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예전과 같은 불공정을 이젠 용납할 수 없다는 집단적 개안(開眼)인 셈이다. 거대 담론으로 대두한 ‘공정한 사회’를 분석해 본다. 》

‘공정한 사회’ 어젠다가 보수 및 진보 진영에 ‘가치(value) 경쟁’을 촉발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가치는 각 진영의 대결 프레임(frame·틀)을 짜는 핵심 기제로 향후 정국을 누가 주도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멀리 2012년 대선 정국까지 내다보는 가치 경쟁에 양 진영이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 보수 진영의 프레임 선점

한나라당은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정한 사회’ 어젠다의 각론을 마련하기로 했다. 안상수 대표는 “‘공정한 사회’의 개념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며 당 산하 여의도연구소에 각론 수립 작업을 맡겼다.

여기엔 큰 그림에 들어갈 세부 내용까지 완비해 프레임 운용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를 통해 보수 진영 전체가 진보 진영과의 대결구도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나가겠다는 복안이다. 여권 일각에선 보수 진영이 펼쳐놓은 ‘공정한 사회’라는 프레임에 진보 진영이 끌려들어왔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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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날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대통령이 연일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청와대와 정부, 권력이 공정하지 못한 것에 문제의 초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원내대표의 언급처럼 ‘공정한 사회’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아직 내부 정비가 미흡한 보수 진영에 짐이 되는 측면이 있다.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이 “‘공정한 사회’가 야당의 공세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도 보수 진영이 짜놓은 프레임 안에서 제기되는 것은 진보 진영에 부담이다.

○ ‘공정한 사회’는 ‘우열 논쟁’의 대상

야당을 포함한 진보 진영은 가치 경쟁에서 ‘공정한 사회’의 대항마를 찾기 위해 고심 중이다. ‘공정한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더 강력한 가치를 제시해야 진보 진영이 담론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정한 사회’ 가치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점도 진보 진영의 고민이다. 그 가치가 그동안 진보 진영이 주장해 온 ‘분배’나 ‘기회 균등’의 가치와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 진영은 어떻게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지를 놓고 보수 진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이철희 부소장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앞으로 ‘찬반 논쟁’이 아니라 ‘우열 논쟁’이 있어야 한다”며 “공정한 사회로 가기 위한 방법, 공정한 사회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모습 등에 대해 각 진영은 분명한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 가치 경쟁의 목표는 ‘중원(中原)’의 주도권

보수 진영이 ‘공정한 사회’의 가치 경쟁에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이념의 중간지대를 선점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많다. ‘가진 자’ ‘특권층’을 대변한다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좌(左) 클릭’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5일 장차관 워크숍에서 ‘기득권자의 기준’을 거론하며 ‘공정한 사회’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6일 제47차 인터넷 라디오 주례 연설에서도 “성장의 온기가 아직 골고루 퍼지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며 “추석을 앞두고 더더욱 서민들의 아픈 마음을 더 느끼고 있다.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지난달 정부에 대북 쌀 지원을 제안한 배경에도 이념의 중원 지대를 노린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이념 지형에서 보수 진영이 중간지대로 나아가는 것은 진보 진영의 설 자리를 좁히는 효과가 있다.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대북 지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경쟁 등의 이슈를 보수 진영에서 먼저 제기한 것도 ‘가치 경쟁’ 전략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중원 공략이 본격화되자 진보 진영에서도 가치 경쟁 방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이 제안한 ‘사회복지 부유세’ 신설 문제가 그 불씨가 됐다. 소득 최상위 0.1% 계층에서 ‘부유세’를 거둬 노인 연금 등의 사회복지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게 제안의 줄기다. 이는 좀 더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보수 진영의 어젠다 공세에 맞서야 한다는 전략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 “좌 편향적인 정책”이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부유세는 오래전부터 민주노동당의 숙원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는 당의 정책 노선이 중간지대를 향해야 한다는 흐름도 있다.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의 상징인 ‘성장’ 등의 가치도 외면하지 않아야 중원의 표심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권의 차기 대선구도를 놓고 치열한 가치 경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어젠다 설정, 방향성보다 방법론 중요” ▼
새로운 프레임의 수확… 권력이 탐내는 순간 물거품


“이번 선거는 ‘국정발전세력’ 대 ‘국정발목세력’의 대결이다.”

6·2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한나라당이 내세운 프레임(틀)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 등 굵직한 외교 성과를 바탕으로 ‘성공과 발전’이란 키워드를 내세워 민주당과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에서 내건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권은 곧바로 ‘친(親)서민’을 전면에 내세웠다. 대규모 서민정책특위를 발족한 데 이어 모든 정책의 눈높이를 서민에 맞췄다. 두 달도 안돼 7·28재·보궐선거에서 예상 밖의 압승을 거둔 한나라당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사 회의실의 표어를 ‘서민경제부터 살리겠습니다’로 바꾸고 ‘서민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여권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 못지않게 중도 진영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정부들도 정권 창출부터 집권 후반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왔다. 5년 단임제하에서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을 놓치지 않으려면 여권과 공직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큰 어젠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문민개혁’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로, 김대중 정부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남북교류협력’으로, 노무현 정부가 ‘탈권위주의’에서 ‘지역 균형발전’ 등으로 국정의 무게중심을 옮겨나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대선에서도 ‘프레임’ 경쟁은 치열하다. 섹스 스캔들에 휩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도덕적 보수주의’를 내걸어 당선됐다. 이어 부시 정부의 끊임없는 전쟁 수행과 보수화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세운 ‘변화’의 프레임에 열광했다.

전문가들은 프레임 전략에서 방향성보다는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내세운 지역 균형발전과 지역주의 극복 등은 방향성 면에서 옳았지만 야권을 아우르는 전략 부재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정치학)는 “프레임의 설정은 대통령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치권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야 한다”며 “또 그 수확을 현재 권력이 얻으려고 하는 순간 용두사미가 될 수 있는 만큼 긴 호흡을 가지고 프레임을 끌고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창 ▼
미국은 110년 전에 ‘공정한 거래’ 화두로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후반기 국정과제로 제시한 ‘공정한 사회’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1901∼1909년 집권·사진)의 정치적 신념이었던 ‘공정한 거래(Square Deal)’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공정한 사회’를 비롯해 이를 뒷받침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친(親)서민 중도실용 정책’도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정책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친기업적이고 보수적인 공화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초기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내세운 것과 유사하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직후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대기업은 이윤 추구에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은 반면 서민들 삶의 안전망은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100년 전 상황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순 없지만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서민들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스퀘어 딜’을 국내 정책의 근간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루스벨트 행정부는 44개 독점대기업을 규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1902년 광부 파업 당시 석탄노조와 회사대표를 동등하게 대했다. 한편으로 노조의 과도한 요구로부터는 기업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 정책이 국민적 지지를 얻어 그는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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