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초선 3인 “법안전쟁 참회합니다”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여야의 ‘법안 전쟁’에 따른 불법과 폭력으로 유린됐다. 대화와 타협, 다수결 원칙이라는 의회정치의 기본이 참담히 무너져 국민에게 절망을 안겼다. 지난해 18대 국회에 처음 입성한 의원들은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서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새 정치를 다짐했지만 한국 정치의 구태를 절감해야 했던 여야 초선의원들의 육성 고백을 들어봤다.》

■ 한나라당 권영진 의원

“직권상정에만 집착 야당설득에는 소홀”

“요즘 학교서 애들끼리 싸우면 너희가 국회의원이냐고 놀려”

초등생 아들 말에 착잡한 심정

며칠 전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아들이 집에서 “아빠, 요즘 학교에서 애들끼리 싸우면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너희들이 국회의원이냐, 여기서 싸움질이나 하게’라고 하거든. 재밌지?”라고 말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밥 먹듯이 법을 어기면서도 우리처럼 당당한 나라가 있을까. 18대 국회가 법을 어겨 가면서 문도 열지 않고 80여 일간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할 때 참으로 괴로웠다. 의원 한 사람의 의지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구시대 정치의 장벽 앞에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안 전쟁’부터 ‘입법 전쟁’까지 여야가 극한 대치를 보이면서 국회는 불법과 폭력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파행 국회에서 계속 금배지를 달고 있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교육을 바로 세워 선진 강국의 기초를 만들고 싶었던 나의 정치적 꿈은 그곳에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불법 폭력은 야당이 저질렀지만 한나라당도 잘한 것은 아니라는 게 많은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사실 18대 국회 초반부터 누적된 야당에 대한 불신 탓에 여당은 처음부터 너무 쟁점법안의 직권상정에만 집착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야당과 진지하게 대화하고 진솔하게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야당 탓만 했다. 물론 한나라당은 야당의 불법 폭력이 합리적 절차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국민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여당이 제대로 일하려면 정치안정과 국민통합의 기반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다수의 힘은 국민의 지지로부터 얻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국회가 싸움질만 하는 상황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도 국민의 가슴을 피멍들게 한 게 사실이다. 나는 이 와중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나 자신에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과거의 잘못된 구태정치를 혹시 나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정치문화를 깨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국민께 깊이 사죄드린다.

●권영진 의원은

△1962년 경북 안동 △고려대 영문학과, 정치학 박사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 한나라당 미래연대 공동대표, 서울디지털대 교수, 서울시 부시장 △18대 국회의원(서울 노원을)

■ 민주당 안규백 의원

“점거농성 시작할 때 당론-소신 놓고 고민”

싸우지 말고 돈 받지 말라

아들이 ‘다짐’ 잊었냐 따져

회초리로 맞은 듯이 아파

“연례행사처럼 연말이면 어김없이 국회에선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이제 그만 하면 안 되겠어요?”

요즘 출퇴근길에 만나는 아파트 이웃 주민들은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 오랜 당직자 생활을 접고 18대 국회에 들어왔을 때 자기 일처럼 환영해주던 분들이다.

한 이웃집 아주머니는 “경제위기가 심각한데 ‘경제 살리기’부터 해 주셔야죠”라고 했다. 나는 “민주당이 ‘MB(이명박 대통령) 악법 저지’에 나선 것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답변을 했다. 그러자 곧 “너무 국회의원 같은 말씀이네요”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씁쓸했다.

국회 본회의장 농성을 마친 뒤 12일 만에 집에 갔을 때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들이 물었다. “아빠, 내가 아빠 국회의원 될 때 얘기했던 세 가지 잊었어? 내가 싸우지 말고, 정보 흘리지 말고, 부탁 받고 돈 받지 말라고 했잖아.” 아들 녀석의 말은 회초리로 맞은 것만큼이나 아팠다.

본회의장 농성이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농성이 시작될 때 소신이 우선이냐, 당과 조직이 우선이냐를 놓고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이 어려운 상황인 만큼 당론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본회의장에서 쇠사슬이 등장했을 땐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라는 걱정보다는 몸싸움 과정에서 다친 우리 당 의원들을 먼저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여야의 모습은 국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국민께 죄송하게 생각한다.

‘입법전쟁’을 통해 민주당의 지지도는 분명히 상승했다. 야당으로서의 존재감도 부각됐다. 그러나 반면에 잃은 것도 있다. 민주당이 경쟁력 있는 ‘대안 야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여당이 잘못하는 일을 비판하고 국민의 마음을 파고드는 대안을 제시하되 잘하는 일엔 박수를 보내야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됐다. 전북도 초대 도의원이었던 아버지는 “정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이유와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새겨보겠다.

●안규백 의원은

△1961년 전북 고창 △성균관대 △평화민주당 공채 1기, 평민당 당보 기자, 새천년민주당 조직국장, 통합민주당 조직위원장, 민주당 지방자치위원장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

■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

“폭력 사태에 눈감고 정치꾼 돼가는 느낌”

“의원님은 뭘 하고 계셨나요?”

주민들, 싸움 못말린 것 질책

소신 지키지 못해서 부끄러워

“국회 안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의원님은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8일 임시국회 본회의를 마치고 지역구인 대전으로 내려갔을 때 주민들은 나를 꾸짖었다. 야당의 폭력 사태를 말리고 국회를 정상화할 생각은 안 하고 지켜보기만 한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자유선진당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양당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중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지만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나도 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이 농성을 벌이던 본회의장 앞을 가봤다. 각종 집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음식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매트 위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야당 의원들을 보면서 같은 의원으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싸움 말리자고 의원 된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의원으로서 회의감도 들었다. 제2야당으로서 비애도 느꼈다. 여당과 제1야당이 전쟁을 벌여도 군소 정당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입법 전쟁’이 한창이던 2일 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공동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의 원내대표가 권선택 의원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로 바뀌었다. 두 당이 미리 약속한 바에 따른 것이었지만 씁쓸했다.

보수 정당인 선진당이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과 손을 잡은 것부터가 당리당략에 의한 것으로 당의 이념과는 맞지 않았다. 선진당과 나를 지지해준 유권자들이 교섭단체 구성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땐 숨고 싶었다. ‘정치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요즘 스스로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다.

예전엔 사회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의원이 되고 나서 오히려 둔감해진 것 같다. 입법 전쟁 같은 정치 현안에 쫓기다 보니 사회 문제를 돌아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론과 다를 땐 내 소신을 포기하기도 했다. 어느덧 ‘정책꾼’이 아닌 ‘정치꾼’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울 따름이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법률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입법 전쟁 사태를 초심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겠다.

●임영호 의원은

△1955년 대전 △한남대 경영학과, 행정학 박사 △행시 25회, 대전 동구청장,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공동의장, 우송공대 초빙교수 △18대 국회의원(대전 동)


‘국회 활극’ 강기갑 대표 사면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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