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트는 역지사지 정치… 상생의 꽃 피울수 있을까

  • 입력 2008년 10월 4일 03시 00분


여당 해 본 野대표 “9월 위기설 정치쟁점 삼지 않겠다”

야당 해 본 與의원 “野주장 세밀히 파악하고 포용해야”

《야당 경험이 있는 여당. 집권 경험이 있는 야당. 10년 만의 정권 교체는 한국 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 같은 공통의 경험을 토대로 바람직한 국정운영과 여야 관계에 대한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진 상태다. 이는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촉진하고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아직은 대립과 갈등의 낡은 정치 행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엔 여야 모두 상생의 정치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여야의 뒤바뀐 역할과 경험이 만들어가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치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10년만에 뒤바뀐 여야… 상대 이해폭 넓어져

대북문제-경제살리기 초당협력 기대감 솔솔

靑 “野는 국정동반자… 현안 적극 설명하겠다”

○ 장관 지낸 野 의원들, “경제 안보 문제서 어려운 정부 처지 이해”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당내에서 ‘강한 야당 부재론’이란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도 경제문제를 정치쟁점으로 삼는 데는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정 대표는 ‘9월 위기설’이 한창이던 9월 초 “위기설은 과장된 것”이라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계획했다가 ‘정부 여당을 돕는 꼴이 될 것’이라는 내부 반대 때문에 보류한 일이 있다.

기업인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그는 위기설의 근거가 빈약한 데다 경제문제의 정치쟁점화는 위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결국 한 조찬기도회에서 이 같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당내 비판이 없진 않지만 그의 발언은 ‘위기설’을 잠재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정치권과 경제계의 중평이다.

민주당 송민순(전 외교통상부 장관) 의원은 지난달 10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긴급 업무보고 자리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상태를 꼬치꼬치 묻는 의원들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워낙 민감한 문제여서 섣불리 얘기할 수도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자 송 의원은 “북한이라는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추측이나 소문에 대해 장관처럼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게 적절하다”고 김 장관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 야당 의원들, “솔직하게 참여와 협조 구하면 길 열릴 것”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국정이 난맥을 보일수록 야당에 명분을 주고 협조를 구해야 정부 여당은 실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외환위기 직후 각 부문의 구조조정이 필요할 때 야당과 국민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당시 정부는 야당에 실상을 충분히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며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운 지금, 정부가 ‘위기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하려 하면 야당은 협조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올 초 정부조직법 개편 당시 여야 쟁점 중 하나였던 방송통신위원회 설치 문제에 대해 “사실 방통위는 노무현 정부 말기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설치를 주장했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때 우리는 효율성 측면에서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자고 했고, 한나라당은 방송의 독립성 훼손을 우려해 반대했다”면서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국익을 위한 방침을 정했더라면 야당이 된 후 처지가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성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농림수산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최인기 의원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로 국민적 저항이 거세졌을 당시 농림부 장관에 취임해 위기를 극복했던 사례를 소개했다. 최 의원은 “당시 국민 동의를 얻기 위해 농어촌발전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여기에 반정부 성향의 농촌지도자들까지 합류시켰다”면서 “이들과 함께 농산물 개방 대책을 만들어 28개 관련 법안을 고치다 보니 어려운 국면을 돌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대여 투쟁 선봉에 나섰던 與 의원, “정쟁보다 정책대안이 효과적 대여 투쟁”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정부 부처에서 자료를 안 주면 야당은 더욱 분노하게 된다”며 “하지만 여당이 되고 보니 부처에서는 보안 문제 때문에 못 내줄 자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나 의원은 또 “야당 때는 항상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정부 여당을) 칭찬하거나 동의하는 데 인색했다”면서 “이 때문에 정쟁 대상이 아닌 정책적 부분까지 정쟁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정책에 대해서는 야당도 오픈 마인드를 갖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같은 당 권경석 의원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예산은 가치중립적인 경우가 많은데 야당 시절 사회복지 예산과 관련해 노무현 정부가 무조건 분배 위주로 나간다고 과격한 비판을 하기보다 시스템이나 전달 체계를 개선하는 쪽으로 대안을 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권 의원은 “대북 문제의 경우 지난 정권 때 여당이 적극적으로 야당을 이해하고 포용했으면 우리가 단상점거를 못했을 것”이라며 “우리도 야당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야당이 주장하는 골격이 뭔지를 세밀히 파악해서 격차를 좁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제사법위원회를 오래 경험한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은 “법사위는 정치 논리보다 법 논리가 지배해야 하는데 지난 국회에서 우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나 대북송금 관련 의혹들을 ‘카더라’ 수준에서 폭로하기도 했다”며 “특히 정권 초기에 근거가 불확실한 의혹을 이슈화하면 국정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은 인도적 대북지원 및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평가를 사례로 들면서 여야 공수교대에 따른 시각 변화를 경험했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 경협 문제를 놓고 ‘대북 퍼주기’라고 비판했다”며 “여당이 된 뒤 당정협의를 통해 정부 운영을 지켜보니까 대북 지원이라는 것이 큰 틀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어느 정도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 청와대, “야당과 수시 대화·설명 통해 초당협력 명분 제공할 터”

10년 만의 정권 교체로 여야가 서로의 처지를 잘 알게 된 상황에서 ‘상생의 싹’을 틔우는 데에는 청와대도 나서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야당이 경제 살리기 등 주요 국정 현안에 초당적으로 협조할 수 있도록 수시로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누고, 청와대로 불러 오찬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국정운영을 논의할 예정이다. 청와대는 주요 정책 현안에 대해 정부 측 관계자들을 보내 설명할 계획이다.

맹형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과거 야당에서 국회의원을 할 때 정부 정보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며 “정책을 함께 생산하는 여당만큼은 아니겠지만 야당이 건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는 언제든 공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전문가들이 말하는 ‘역지사지 정치’의 조건

“투사적 언어 대신 실현가능성 생각해야”

‘역지사지’를 통한 정치발전을 모색할 때 자주 인용되는 것이 “정권이 최소한 두 번은 교대될 때 민주주의 기반이 비로소 굳어진다”는 경구다.

새뮤얼 헌팅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쓴 이 표현은 여당과 야당 경험을 반복하는 동안 ‘한쪽 시각’이 아닌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중앙대 장훈(정치외교학) 교수는 3일 “여당을 경험한 야당, 야당을 경험한 여당은 현실 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며 “투사적 언어 대신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는 환경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에 대해 “여당의 때를 못 벗었다”거나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는 말로 투쟁성을 강조하는 것은 ‘여당 경험’이라는 자산을 살리지 못하게 만드는 말이라는 지적도 있다. 장 교수는 “그 같은 표현은 지극히 20세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세대 장동진(정치외교학) 교수는 “야당의 역할에 대한 시대적 감각이 달라졌다”며 야당의 기능이 달라질 것을 주문했다. 장 교수는 “비판과 문제 제기가 야당의 역할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이 맞은 국내외 위기상황을 고려한다면 비판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를 하는 방식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투명성 확대는 역지사지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변수다. 한 정치인이 과거에 한 발언과 법안표결 기록이 손쉽게 유권자에게 전달되면서 ‘과거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한 발언과 행동은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국대 곽진영(정치외교학) 교수는 정치인의 자율성 확보를 역지사지 정치의 외형적 조건으로 꼽았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당론에 얽매이고 ‘당내 왕따’를 피하기 위해 정쟁적 발언을 일삼는 상황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발언이 나오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곽 교수는 “사석에서 만난 정치인에게서 상대 정당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걸 알게 된다”며 “(상대당의 의견에 가까운) 이견을 말할 때 출당시키거나 공천을 안 주는 등의 피해가 큰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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