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훈수정치’ 어디까지 가나?… 정치권·학계 논란

  • 입력 2007년 6월 2일 1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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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태상왕(太上王)정치, 훈수정치, 지역주의 화신, 계보정치 답습, 민주주의 원리 훼손.’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최근 정치행보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DJ의 현실정치 움직임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지난 26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사생결단’의 자세로 대통합을 이뤄내라고 주문했다. 야권은 “마치 DJ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정치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DJ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의 현실정치 개입은 민주발전에 역행하는 것이다.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북한의 핵실험 이후 시작된 DJ의 정치개입은 지난달 독일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DJ는 귀국 후 중도개혁통합신당의 신국환 대표에 이어 손학규 전 경기지사,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 정 전 의장, 김한길 통합신당 대표, 박상천 민주당 대표, 이해찬 전 총리,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차례로 만났다. 한명숙 전 총리와 김근태 전 의장도 금명간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거론되는 범여권 대선후보들을 총망라하는 셈이다.

DJ는 이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민은 대선에서 여야 일대일 대결을 원한다. (한나라의 독주를 막기 위해선) 누군가 한 사람이 나타나 정국을 리드하거나 사생결단이라도 해야 한다. (소)통합에서 멈춰선 안 된다. 반드시 대통합의 길을 열기를 바란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비(非)한나라당, 중도개혁세력, 재야세력까지 포함해 대통합하라는 것이다”며 훈수를 아끼지 않았다.

DJ는 ‘훈수정치’ 논란에 대해서 “내가 50년간 몸담은 민주개혁세력의 지리멸렬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점잖게 있을 순 없다. 국민의 바람을 전달하고 소신껏 얘기한 것일 뿐”이라며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야당 “상식, 한계를 벗어난 발언”비판

DJ의 이런 행보에 대해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29일 “DJ가 발악을 하고 있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정권을 빼앗겨 교체 되면 자기가 죽는 줄 안다. 하도 부정한 게 많아서 말이야. 자기가 발악한다고 발악하는 대로 되느냐. 참 불쌍한 사람이다. 지금 말할수록 더 안 되게 돼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도 “호남이 당신의 바지주머니 속에 영원히 들어있다는 착각을 버리라”, “서산에 떨어지는 해를 따라 길을 찾는 일을 그만두기 바란다” 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DJ의 정치발언은 훈수를 넘어 스스로 지휘봉을 잡겠다는 것으로 계보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했고, 노회찬 민노당 의원은 “전직 대통령의 지시성 당부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DJ의 대선 인식은 지역주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안희정 “한나라도 전두환·김영삼 두 분께 얘기 들으면 될 것”

범여권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대통합’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우리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DJ를 적극 옹호했지만, 민주당과 일부 우리당 의원들은 우려를 표시했다.

우리당 몇몇 의원들은 “정치원로의 경험과 경륜을 듣고 조언을 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정도의 조언을 할 수 있다”고 옹호했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인 안희정 씨는 한 라디오방송에 나와 “못마땅하면 한나라당도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한테 가서 얘기를 들으면 될 것 아니냐”며 “집에 찾아온 후배 정치인들에게 한마디씩 하는 것까지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두둔했다.

반면 문학진 의원은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전직이든 현직이든 몇 달 안 남은 대선 등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인상을 주는 건 한국 정치발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조순형 민주당 의원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처신, 상식, 한계를 벗어났다. 내년에도 전직 대통령이 한 분 생기는데 전직마다 현실정치에 개입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민주당이든 열린우리당이든 언제까지 DJ에게 의존하는 유아기적 정치를 할 건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제 DJ의 젖을 뗄 때가 되지 않았나, 자주 자립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민주당 분당에 책임이 있는 노 대통령과 DJ가 이제 와서 여권 대통합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분당을 적극 막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DJ, 왜 다시 정치일선에 나서나

꾸준히 ‘정치 불개입’을 선언해온 DJ가 부담을 무릅쓰고 현실정치에 나서는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정치권에서는 “정권이 바뀔 경우 DJ에까지 그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노벨평화상을 둘러싸고 일었던 잡음과 재임 중 터졌던 각종 ‘게이트’ 등이 다시 불거질까봐 우려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여권의 한 중진의원은 2일 “이대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햇볕정책’ 등 DJ의 정책이 송두리째 부정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DJ가 내년 총선까지 호남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이것저것 걱정 많은 DJ와 호남표심에 기대고 싶은 범여권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DJ 자택의 문턱이 닳고 있다는 해석이다. DJ는 김한길 대표와 만나 “이번 대선에서 잘못하면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심판 받는다”며 차기 총선을 걱정하기도 했다.

◇“정치권에 기웃거리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보복폭행 사건에 개입한 최기문 전 경찰청장에 빗대 DJ의 정치행보에 우려를 표시했다.

임 교수는 “전직 고위 공무원이 과거 연고를 내세워 각종 압력과 청탁을 자행해서는 안 되듯, 전직 대통령이 한때 누렸던 정치권 및 유권자와의 연고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도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퇴임 후 자선과 봉사를 실천하는 미국 지미 카터나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빌 클린턴의 예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며 “전직 공무원이나 전직 대통령은 자기가 몸담았던 행정부나 정치권을 기웃거리지 않을 때 아름다운 원로로서 국민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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