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브로커들 백태]“○○○후보 모시고 있다… 자금 좀…”

  • 입력 2007년 4월 28일 03시 02분


《올해 초 민간단체 주최로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만찬행사. 말끔하게 차려입은 30대 남성이 10명이 앉을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에 앉으며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국포럼에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비서관 ○○○입니다.”

그는 ‘안국포럼 ○○○ 비서관’이라고 적힌 명함을 일일이 돌렸다. 40, 50대 여성들과 중년 남성들은 관심 있게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젊은 분이 어떻게 안국포럼에 계세요?”

한 40대 여성이 그에게 물었다. 이어 “제가 다니는 피트니스센터 모임에서 이 시장님의 인기가 좋아요. 다들 팬이에요” 라며 말을 이어갔다.

“무슨 모임이라고요? 혹시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제가 (이 전 시장에게) 말씀을 드려서 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전 시장과 무척 가깝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테이블에는 안국포럼에 줄이 닿는 다른 남성이 앉아 있었다.

“안국포럼 ○○○ 씨를 아세요. 제가 아는 사람이 안국포럼에 있는데….”

비서관이라던 그는 멈칫하다 말문을 닫았다. 그는 행사가 끝난 뒤 안국포럼 관계자를 안다는 남성에게 “오늘 일은 안국포럼에 계신 분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안국포럼에는 ‘비서관’이란 직함이 없다. 확인 결과 안국포럼 실무자들조차 그의 이름을 몰랐다.》

▼측근 행세형▼

‘○○○ 비서관’ 명함… 확인해보면 “아, 그게…”

대선을 겨냥한 선거브로커들이 다양한 형태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측근’ 행세를 하며 주변을 현혹시키는 ‘측근 행세형’이 대표적이다.

한 캠프 관계자는 “예를 들어 우리 조직에 모두 10만 명 정도가 있다고 하면 이 가운데 소위 서열 1000명 안에 들어갈 경우 ‘후보 ○○○를 모시고 있다’고 얘기를 하고 다니는 분위기”라며 “이 가운데 캠프 명함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은 ‘참모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실제 이 전 시장 캠프인 ‘안국포럼’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캠프의 ‘박근혜를 돕는 사람들’ 명함을 갖고 있는 캠프 관계자는 각각 300명 선이다. 이 가운데 대선주자와 늘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30명 안팎에 불과하다.

한 캠프 관계자는 “캠프 사람이 맞느냐는 확인 전화가 심심치 않게 온다”며 “확인해 보면 90%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측근 행세를 하며 ‘자금’을 모으는 경우도 있다. ‘후보 ○○○를 모시고 있는데 자금이 필요하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끌어 모은다는 것.

올해 초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1980년대 초반 운동권그룹 가운데 한 팀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지원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후 이 팀에 속한 한 변호사는 변호사 친구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정 전 총장을 돕기 위해 우리가 돈을 좀 모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운을 띄웠다고 한다.

정 전 총장 측은 최근 황당한 일을 당했다. 한 인터넷매체에 ‘정 전 총장이 현실적으로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는 열린우리당의 한 고문 이야기가 공개되면서 ‘정 전 총장 측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

정 전 총장 측은 “그분이 정 전 총장의 이름을 팔면서 돈을 걷으려 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정 전 총장과 그 고문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돈을 모을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정보 장사형▼

후보 옆에서 사진 찍고 “경호업체” 홍보하기도

선거 승리를 위한 중요한 정보가 있다며 무작정 캠프를 찾아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내놓는 정보의 질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최근 박 전 대표 캠프에 ‘정보 보따리장사’가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 후보의 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며 보따리를 풀었다. 하지만 내용은 뻔한 것. 시중에 흘러 다니는 ‘사설정보지(일명 찌라시)’ 수준의 내용을 짜깁기한 게 전부였다.

지난달 이 전 시장 캠프를 찾은 한 40대 남성이 보따리를 풀었다. 이른바 ‘필승비책’. 캠프 관계자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관심을 가졌지만 풀어놓은 내용은 보잘것없었다.

이 남성이 내놓은 ‘필승비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붙잡아야 한다’ ‘호남 표를 잡아야 한다’ ‘중도 개혁 세력을 끌어안아야 한다’ ‘언론을 우군화해야 한다’ ‘북한하고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 ‘평양을 대선 전에 방문해야 한다’ ‘미국과 긴밀하게 지내야 한다’ 등이었다.

캠프 관계자는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들이 갖고 오는 정보나 아이디어는 대부분 허술하다”면서 “값어치 있는 정보는 캠프 채널을 통해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웃지 못 할 일들도 벌어진다.

이 전 시장은 3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1만5000여 명이 운집한 장소에서 이 전 시장 주변에 말끔하게 차려입은 건장한 젊은이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졌다.

캠프 관계자가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이들은 한 사설업체 경호요원들. 이들은 이 전 시장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경호업체 홍보를 위해 이 전 시장 주변에서 사진을 찍어 간 것이다. 이 업체는 이들 사진을 업체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이 전 시장을 경호했다’며 업체 홍보를 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직 과시형 ▼

“향우회장 맡고 있다”… 사설 조직 만들어 돈 챙겨

자신이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다며 돈을 요구하는 전통적 의미의 브로커들도 있다.

올해 초 박 전 대표 캠프로 종교적 성향을 띤 한 이익단체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몇 만 표는 거뜬히 모을 수 있다. 대신 자금을 지원해 달라”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지난달에는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일을 했다는 한 남성이 찾아와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전국에 수십만 명이 있는데 내가 다 엮어서 데려오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더니 “그러기 위해 홍보 제작물이 필요한데 제작비를 지원해 줄 수 없느냐”고 본색을 드러냈다. 이들은 주로 ‘동창회’ ‘향우회’ ‘전우회’ 등 단결력과 조직력이 뛰어난 조직들을 동원할 수 있다며 돈을 요구하고 있다.

외곽 사설 조직을 만들어 놓고 캠프의 이름을 팔아 돈을 모으는 사례도 있다.

박 전 대표 측 관계자는 “박 캠프 외곽조직이라고 만들어 놓고는 ‘캠프에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니 조직원들이 스스로 돈을 내야 한다’며 조직원들의 돈을 챙긴 경우가 있었다”면서 “문제를 적발하자 다른 캠프로 가겠다며 오히려 협박까지 했다”고 말했다.

돈 대신 캠프 내 자리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한 50대 남성이 박 전 대표 캠프로 찾아왔다. 그는 “○○○포럼을 만들고 있다. 집행부는 구성했고 전국 단위로 조직을 확대할 예정이다”라며 자신의 업적을 장황하게 늘어놨다. 그러면서 요구한 것은 캠프 내 자리였다. 박 전 캠프는 이후 이 남성이 조직하고 있다는 포럼을 알아봤지만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형적인 브로커였다.

정 전 서울대 총장은 아직 조직이 없다. 아직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탓에 조직 작업을 대신 해 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한다.

2월 호남 출신의 한 교수에게 정 전 총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옛 민주당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당신이 호남지역을 잘 아니 정 전 총장을 위해 조직을 꾸려 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정 전 총장이 직접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정 전 총장이 출마하기로 결정하면 정 전 총장과 함께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조직을 강화하고 있는 한 정치권 인사가 최근 정 전 총장 측에 “내가 대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조직이 있는데 정 전 총장이 나서면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얘기도 있다.

정 전 총장 측은 “방대한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그룹과 꾸준히 만나 왔기 때문에 정 전 총장의 정치 참여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들이 알아서 정 전 총장을 돕겠다는 뜻을 전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과거 대선 브로커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DJ) 후보 측은 ‘이제 김대중 총재 특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선에 필요한 인력 동원을 위해 남발했던 특보 직이 정치브로커의 신분 보장용으로 쓰이며 부작용이 커지자 거둬들인 것이다.

그해 국민회의 경선과정에서 활동한 최규선(사진) 씨도 정치 브로커 중 한 사람이다.

최 씨는 5월 국민회의 전당대회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인권운동의 대부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딸을 초청하고, 만델라가 30년 동안 찼던 손목시계와 만델라 대통령의 축하 영상 테이프를 가지고 왔다.

당시 DJ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정치권 인사는 “최 씨가 ‘넬슨 만델라를 데려오겠다’고 해서 모두 코웃음을 쳤는데 딸을 데려오고 시계를 가져와서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최 씨는 이후 미국의 세계적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데려와 DJ와 만나게 하기도 했다. 최 씨는 DJ가 대통령이 된 뒤 대통령비서실에 합류할 뻔했지만 무산됐다. 이 정치권 인사는 “최 씨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 DJ에게 안 된다고 했다. 사고를 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최 씨는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는 “마이클 잭슨, 타이거 우즈, 마이클 조든을 불러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했다. 결국 2002년 DJ의 3남 김홍걸 씨에게 로비행각을 벌인 것이 드러나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로 옥고를 치렀다.

2002년 상반기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측 캠프에는 특보 직함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당시는 이 후보가 연말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예상되던 때였다.

이 후보 캠프 참모로 있던 한 인사는 “이 후보는 사람을 직접 보고 쓸지 말지를 결정했기 때문에 특보 직함을 받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7년 대선 때도 이 후보의 대선캠프였던 부국팀에는 각종 정치 브로커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전국적으로 포럼이나 산악회 조직을 갖고 있다며 활동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부국팀에서 확인해 보면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유령조직이거나 유명무실한 조직이 대부분이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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