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터지자 “공식라인 죽었다” 비선 활개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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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전 국무총리(가운데)와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왼쪽) 등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대표단이 8일 방북했을 당시 평양 제1중학교에서 학생들의 과학 실험을 참관하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운데)와 이화영 열린우리당 의원(왼쪽) 등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대표단이 8일 방북했을 당시 평양 제1중학교에서 학생들의 과학 실험을 참관하고 있는 모습.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난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7월 5일)와 핵실험(10월 9일)으로 남북관계가 단절되면서 상시적인 대북 접촉을 해오던 공식라인과 비선(秘線)라인 사이에 대북 접촉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됐다.

비선라인은 공식라인이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했고 2000년 정상회담 이후 7년이 지나도록 2차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며 “공식라인은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으로 대표되는 공식라인은 비선라인이 접촉하는 북측 인사들의 신뢰성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공개된 절차에 따라 추진하고 있다’며 공식라인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측근인 안희정 씨의 대북 접촉을 지시해 공식라인과 비선라인의 경쟁을 유도한 셈이 됐다.

○ 비선라인의 약진

남북관계 경색은 비선을 자처하는 ‘대북사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핵실험의 여파로 이종석 당시 통일부 장관이 물러나자 청와대와 정치권 일각에선 “비선을 통한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이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북사업가’들은 현 정부의 386 실세들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외교안보 부처의 핵심에서 줄곧 일해 온 한 인사는 “북한이 원하는 경제협력 사업 등의 조건이 충족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설득해 정상회담을 끌어 낼 수 있다는 식의 제안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호철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을 통해 노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 씨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권오홍(47) 씨는 이 같은 시도가 성공한 드문 케이스.

대기업에서 북한담당 상무로 일했던 A 씨는 현 정부의 실세였던 B 씨와 북한의 주규창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의 면담을 주선했지만 무산됐고, 또 다른 비선인 C 씨 역시 김 국방위원장의 김일성대 동문인 강관주 대외연락부장과 줄이 닿는다는 점을 내세워 ‘한 건’을 해보려다 실패했다.

비선의 공식라인에 대한 공격도 거셌다. 안 씨의 대북 접촉을 주선한 권오홍 씨의 비망록에는 “국가정보원은 자신들 이외에 제3의 루트가 개설되는 것 자체를 막는다는 원칙을 바꾼 적이 없었다”며 “그들은 공식 대화 파트너를 통일전선부로 삼는 습속을 깨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 공식라인의 위기와 견제

비선들이 활개를 치자 공식라인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사일 발사 등을 거치며 6자회담 무용론이 급부상했고, 노 대통령도 ‘더는 6자회담의 효용성이 없어진 것 아니냐’며 회의적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비선라인에 대한 기대도 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 씨는 비망록에서 “이화영 의원은 12월 16∼19일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노 대통령을 세 차례 만나 지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은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안 씨의 대북 접촉에 대해 “공식 협의 채널이 좋지 않으면 정보가 있을 때 정보의 신뢰성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 당시 공식라인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음을 시사했다.

공식라인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은 3차장 산하의 모든 대북라인을 가동해 북측 인사들과의 접촉에 총력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3국에서의 남북 간 접촉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실무 단위의 접촉이기는 하지만 국정원은 정상회담을 위해 지난해 말부터 홍콩 등지에서 북측 인사들을 여러 차례 접촉했다”고 주장했다.

○ ‘확인하라’는 지시가 ‘추진하라’로 증폭됐을 수도

안희정 씨의 대북 접촉도 공식라인과 비선라인의 이런 주도권 경쟁의 와중에서 이뤄졌다.

여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안희정 씨 등의 비선을 통해 실제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 했다기보다는 ‘그런 정보가 있다면 한 번 확인해 봐라’라는 의미로 지시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 지시가 ‘추진하라’는 식으로 증폭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노 대통령은 공식라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북채널이 막힌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비선을 활용했지만 6자회담의 진전으로 정부 차원의 공식 접촉이 재개됐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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