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韓日, ‘좋은 이웃’ 경쟁하라

  • 입력 2005년 1월 26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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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경험이 있는 유럽의 이웃 나라 외교관 사이에 과거사 논쟁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상대국의 과오를 비난하고 자국의 대응을 옹호하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설전은 어느 나라의 수준이 더 높은지를 따지는 감정싸움으로 변했다.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지만 한번도 이웃의 국경을 넘지 않았던 평화애호국의 외교관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비록 하나뿐이기는 하지만 귀국(貴國)이 우리에게 없는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귀국에는 ‘훌륭한 이웃(good neighbor)’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승부는 갈렸다.

얼마 전 유럽 외교관에게서 들은 에피소드다. 그가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官製 화해’의 한계▼

이틀 전 도쿄에서 ‘한일 우정의 해’ 개막식이 열렸다. 오늘 저녁에는 서울에서 같은 행사가 진행된다. ‘훌륭한 이웃’ 얘기를 하기에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양국은 치밀하게 행사를 준비했다. 일본에서 열린 개막식은 한국 측이, 서울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일본 측이 주최한다. ‘우정’을 위해 주고받는 모양새가 나쁘지는 않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개막 리셉션에서 “양국 국민 서로가 공통점과 함께 차이를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점을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상호이해의 첫걸음”이라며 다양한 교류행사를 통해 한일 관계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 개막식에서 이에 걸맞은 화답(和答)을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 국민의 체감온도는 그다지 높은 것 같지 않다. 이틀의 시차를 두고 거창한 축제가 이어지지만 서울 분위기는 오히려 냉담해 보인다. 잔치에 동참하기에는 지난주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다시 일깨워준 일제 강점의 고통이 너무 크다.

정부가 주도하는 ‘관제(官製) 화해’의 한계다. 한일 양국이 진정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우정의 해 개막식이 행사 참가자만의 잔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 대중문화에 심취하는 일본인들이 늘고,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팀을 응원한 일본인들이 우리를 흐뭇하게 했지만 대다수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한마디에 좋았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양국 정상이 달콤한 외교적 수사(修辭)를 교환해도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모든 것을 거품으로 만든다.

한일 양국민의 가슴속에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한 걸음 접근했다가 쉽게 두 걸음 물러서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한 한일관계에 우정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해법은 진솔한 사죄와 용서뿐이다.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들이 이룩한 화해를 보라.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국의 격전지였던 베르ㅱ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프랑스 전사자 무덤 앞에 섰다. 양국 국민을 참회와 포용으로 이끈 감동적 장면이었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한 확실한 참회였다.

▼지도자가 앞장서야▼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에게도 기회는 있다. 예를 들어 양국 지도자가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을 방문해 고개를 숙인다면….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가 손을 잡고 위로한다면…. 한일이 서로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한일 우정의 해’는 겉치레 행사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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