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상돈]逆매카시즘의 함정

  • 입력 2004년 11월 24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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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심각한 이념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매카시즘’이니 ‘역(逆)매카시즘’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검찰이 송두율씨를 기소하자 진보세력은 “매카시즘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10월 말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 집권당이 추진하는 개혁입법은 북한이 원하는 일”이라고 비판하자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이를 ‘천박한 매카시즘’이라고 비난했다.

매카시즘은 1950년대 초 미국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에 57명의 공산당원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데서 비롯된 용어다. 매카시의 주장이 나오자 상원은 이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6·25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벌어진 청문회는 큰 주목을 받았다.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행정부에서 대외정책에 간여했던 고위 관료와 저명 인사들이 줄줄이 증언대에 나왔다. 그러나 청문회가 해를 넘겨 계속되고 분명한 증거가 드러나지도 않자 일종의 피로감이 감돌았다. 특히 상대방을 유죄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그의 수법이 물의를 빚었다. 1954년 12월 2일, 미 상원은 매카시를 견책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매카시는 실의에 빠져 1957년 5월 48세로 사망했다.

매카시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던 존스홉킨스대의 오웬 래티모어는 증거도 없이 상대방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수법을 매카시즘이라고 불렀다. 그 후 이 말은 진보파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됐다. 진보세력은 간첩 혐의를 받았던 앨저 히스, 원자탄 기밀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사형 당한 로젠버그 부부 등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매카시스트로 비난받을까 봐 입을 닫았다.

세월이 흘러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시대의 극비문서가 햇빛을 보게 됐다. 히스 등 매카시가 소련의 간첩이라고 지목했던 사람들은 정말 간첩이었다. 매카시가 문제를 선동적으로 다룬 것은 잘못이지만 그가 제기했던 것은 진실과 대체로 부합했다. 매카시는 루스벨트와 트루먼 행정부가 공산주의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고 비난했는데, 이도 사실이다.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에 이르는 동안 미국 정부 내에는 소련의 간첩이 많았다. 매카시즘이란 용어를 만들어낸 래티모어는 한반도가 소련 통치하에 들어가는 게 좋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공산주의자였다.

매카시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입수했는가에 대해선 아직 논의가 있지만 보수파인 에드거 후버 당시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이 제공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후버는 1953년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자 더 이상 매카시를 도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린든 존슨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는 매카시에 대한 징계를 추진했던 것이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입지전적 인물인 매카시는 성격이나 행태에 있어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문제와 별개로, 그의 주장이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매카시 때문에 많은 미국 시민이 고통을 당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한 사람은 대개 간첩과 공산주의자, 그리고 중국 등을 공산당에 넘겨준 무능한 관료들이었다.

최근 미국에선 매카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가 어느 정도 누명을 벗을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진실을 말한 매카시는 ‘미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조국을 배반한 히스 같은 간첩은 ‘지성인’으로 받드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반성’이 나온다고 한다.

진보니 좌파니 하는 사람들이 문제만 생기면 ‘매카시즘’을 들먹이고, 보수니 뭐니 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할말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요즘 세태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우스운 것이 될지 모른다.

이상돈 중앙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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