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거부한 것도 민주화운동인가”

  • 입력 2004년 7월 2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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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에 대해 민주화운동을 인정,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박주일기자
비전향장기수에 대해 민주화운동을 인정,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박주일기자
남파간첩 빨치산 등 3명의 비전향장기수 사망사건에 대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고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며 ‘의문사 인정’ 결정을 내리자 이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인정’ 결정 과정=2기 의문사위의 이 같은 결정은 “이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한 사회주의자로 민주화운동과 연관성이 없다”는 1기 의문사위의 기각 논리와 배치된다.

1기 위원이었던 서울대 의대 이윤성(李允聖) 교수는 “민주화운동이란 민주헌정 질서 확립에 기여하는 것”이라며 “당시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그들이 체제와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말했다.

2기 의문사위 내에서도 결정 단계까지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4일과 30일 위원 7명 전원이 참석한 회의에서 의문사로 인정하자는 위원이 4명, ‘기각’이나 ‘진상규명 불능’ 등을 표명한 위원이 3명이었다는 것.

사태가 확산되자 의문사위는 2일 이 사건에 대한 ‘결정(안)’을 발표했다.

의문사위는 “손윤규씨가 사상전향공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행한 단식투쟁은 ‘의문사진상규명 특별법’에서 규정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별법 제2조 2호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 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을 말한다.

서재일 특별조사과장은 “개인의 전력 때문에 그가 주장하거나 행한 행위가 모두 인권 및 민주주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문제점=그러나 이 해명에 따르더라도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신봉한 것이 민주헌정 질서 확립에 기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의문사위는 또 최석기 박융서씨에 대해서는 ‘사상전향공작에 대한 거부’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허영(許營) 명지대 법학과 교수는 “남파간첩들이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돼 복역 중 자신들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려고 한 것이 어떻게 민주화운동이냐”며 “개인의 사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민주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이번 결정은 대단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1기 의문사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2기 의문사위가 법을 넓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며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항거가 민주화운동이라고 규정한 법 자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수 프로필 숨겼나=의문사위는 1일 배포한 보도자료에 이들 3명의 이력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의문사위가 이들이 남파간첩이나 빨치산이라는 점보다 정보기관의 ‘전향공작’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1일자 보도자료는 완전한 결정문이 아니라 이들의 사망 과정에 대한 조사발표 자료였다”며 “결정문이 아니기 때문에 인적사항 등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은 것이지 감추려 했던 것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의문사위는 또 “이들에 대한 인적사항은 1기 위원회 결정 당시 이미 알린 바 있다”고 덧붙였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민주화’인정 3인의 행적▼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인정한 3명 중 최석기, 박융서씨는 1950년대 북한이 남파한 간첩이며 손윤규씨는 6·25전쟁 당시 지리산을 근거로 활동한 빨치산 출신이다.

의문사위와 관련 기록들에 따르면 최씨는 1923년 남한에서 태어나 48년 월북해 북한의 교육을 받았다. 53년 10월 30일 전남 보성군 벌교 방면으로 침투한 최씨는 북한과 지리산의 빨치산을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씨는 남한에 온 지 1년여 만에 붙잡혔으며 55년 광주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20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하다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74년 4월 4일 사망했다. 당시 사망기록엔 ‘심장마비’로 적혀 있으나 의문사위 조사결과 최씨의 전향 공작을 위해 경찰이 투입한 폭력범 재소자 2명에게 폭행을 당해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1921년생인 박씨 역시 57년 9월 5일 경기 연천군 신탄리로 육상 침투한 간첩. 인민군 제대 후 남파돼 서울로 잠입하다 검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경찰에 협조하기도 했던 박씨는 58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재판에 회부돼 59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박씨 역시 대전교도소 복역 중 교도관, 전향공작전담반 등에게 고문을 당하다 74년 7월 20일 ‘전향을 강요 말라’는 내용의 혈서를 남기고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긋고 자살했다.

손씨(1923년생)는 6·25전쟁 때 북한군이 후퇴할 당시 지리산 빨치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5월 18일 자수한 손씨는 그해 육군 제2군사령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60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의문사위에 따르면 손씨는 한때 전향을 결심하고 전향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문 등을 이용한 강제전향 방식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벌이다 폭행은 물론 고무호스를 위에 넣어 음식물을 투입하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손씨는 76년 4월 1일 전신쇠약 및 빈혈로 대구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정양환기자 ray@donga.com

▼2기 위원들…위원장 포함 7명 진보적 성향 다수▼

2기 의문사위의 위원들은 한상범(韓相範)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7명. 출범 당시 9명이었으나 전해철(全海澈) 위원은 5월 19일 대통령민정비서관을 맡으면서, 서재관(徐在冠) 위원은 지난달 1일 일신상의 이유로 각각 사임했다.

한 위원장은 동국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현재 동국대 법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인권정보센터 등 여러 시민단체에서 인권 등과 관련해 시민운동을 펼쳤던 진보적 학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1기 의문사위에서도 초대 위원장인 양승규(梁承圭·법학) 현 가톨릭대 대우교수에 이어 2002년 4∼9월 위원장을 지냈다.

김희수(金熙洙) 제1상임위원은 전북대 법대를 나와 1987년 사법시험(27회)에 합격했다. 1990∼95년 서울지검 수원지검 등을 거쳤으며 변호사 활동 당시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을 지냈다. 대통령 탄핵 사태 와중이던 3월 19일 의문사위 소속 위원 및 직원 43명의 명의로 ‘탄핵규탄 시국선언’을 주도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

홍춘의(洪春義) 제2상임위원은 의문사위 위원 중 유일한 직업공무원 출신. 성균관대(경영학), 미 남캘리포니아대(행정학 석사)를 나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지원단장,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조사1국장 등을 역임했다.

나머지 4명의 위원은 변호사인 이기욱(李基旭) 위원을 제외하고 모두 교수 출신. 이석영(李碩榮) 위원은 전북대 농대 명예교수, 강경근(姜京根) 위원은 숭실대 법대 교수다. 서울대 의대 교수인 황상익(黃尙翼) 위원은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이기도 하다.정양환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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