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오타 시크의 ‘십계명’과 美國

  • 입력 2004년 6월 16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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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시크.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던 체코슬로바키아 개혁 공산주의 운동의 주역 두브체크와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건설을 꿈꾸던 경제학자. 그러나 그해 여름 소련의 전차부대가 침공해 프라하의 개혁운동을 짓밟아버리자 스위스로 망명해 대학 강단에 섰다는 얘기까진 들었다.

▼체코학자의 ‘독재치하 살아남기’▼

최근 한양대의 권영훈(權寧壎) 교수로부터 스위스 유학시절에 만난 오타 시크의 강의에 관한 회고담을 들었다. 특히 재미있던 것은 일당독재 국가에 사는 오타 시크의 요령 십계명(十誡命). 1. 바보가 되라. 2. 그게 안 되면 생각하지 마라. 3. 생각은 해도 말하지 마라. 4. 말은 해도 글은 쓰지 마라. 5. 글은 써도 서명은 하지 마라. 6. 서명은 해도 내 것이 아니라고 잡아떼라. 7. 그게 안 되면 미쳐버려라. 8. 그러지도 못하면 자살을 하라. 9. 그것도 못하면 서방으로 탈출하라. 10. 그러지도 못하면 당에 입당해버려라.

일당독재도 전체주의도 경험해보지 못한 요즈음 젊은이들에겐 재미없는 얘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 치하를 살아 온 세대, 또는 6·25전쟁 때 인공(人共) 치하를 살아본 세대, 아니 그보다도 오늘 평양으로 돌아가는 북녘 손님들에게는 이 십계명이 그냥 듣고 흘려버리기 어려우리라 여겨진다.

나도 20 전후의 젊은 나이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정의는, 그리고 미래는 우리들의 구질구질한 현실을 초월한 ‘저쪽’에, 38선 북쪽에 있으리라 기대해봤다.

6·25 남침전쟁은 그처럼 일상적 현실을 초월한 ‘저쪽’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새벽부터 ‘민주선전실’엔가 가서 교양을 받고 폭격이 뜸한 밤에는 거리에 나가 ‘약소민족 해방의 위대한 은인이시며…’로 시작되는 길고 긴 수식어가 붙는 스탈린 대원수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구호를 소리소리 지르며 거리를 행진하고 그러다 녹초가 돼 쓰러져 자고 나면 다음날 새벽 다시 민주선전실의 교양…. 그야말로 바보가 될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6·25 남침전쟁으로 이 나라가 통일이 됐더라면…. 아마 그랬더라면 남쪽의 우리도 그로부터 40∼50년 동안 오타 시크와 그의 동포처럼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탈출’을 시도하거나 ‘당원’이 되어버려야 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불행을 맛보지 않게 된 것은 우리들의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 오직 38선 이남에서 우연히 삶을 얻은 행운이요, 그 행운은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고 (그 비난에는 젊은 날의 나도 한때 가세했지만)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의 덕택이다.

나는 이 박사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 말하곤 한다. 한말의 어지러운 풍운 속에서 사람들이 가까운 중국과 러시아만을, 혹은 대한해협 건너 일본만을 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보이는 것의 피안(彼岸), 수평선 뒤의 ‘저쪽’을 보고 거기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역사에 러시아 대신 미국을 끌어들인 이 박사의 결단의 소산이다. 그게 잘된 결단이었느냐는 문제에 대해선 이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수천 년 역사에서 우리가 오늘날처럼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산 때가 없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도 이론이 있을까.

▼건국의 동반자 미국이 떠나는데…▼

그러한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이 이 땅에 옛날처럼 중국을 끌어들이지 않고, 한말처럼 일본을 끌어들이지도 않고, 혹은 광복 후의 북녘처럼 러시아나 중국을 끌어들이지 않고 그도 저도 안 되면 ‘자주’다 ‘주체’다 하며 버티지도 않고 우리 겨레의 명운에 미국을 끌어들인 이 박사의 경륜 덕이었다고 한다면 망발일까. 우리보다 앞서 갔던 체코 같은 동유럽 제국이 1945년 이후 걸어 온 운명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미국이 이 땅에서 나가려 하고 우리 스스로 내보내려 한다면…, 그다음엔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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