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84/총선]총선현장서 본 한국 민주주의

  • 입력 2004년 3월 31일 19시 00분


31일 서울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은 박찬욱 서울대 교수. -김경제기자
31일 서울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를 찾은 박찬욱 서울대 교수. -김경제기자
《17대 총선을 계기로 한국민주주의가 한 단계 전진할지, 아니면 포퓰리즘과 갈등구조 속에서 퇴보할지 주목된다. 본보와 공동으로 올 초부터 한국정치 변화의 흐름과 의미를 진단해온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소장 박찬욱·朴贊郁 교수) 연구진은 후보 등록 첫날인 31일 한국정치의 미래를 현장에서 짚어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연구진의 결론은 한국정치의 발전 잠재력은 크다는 것이었다. 본보와 한국정치연구소의 공동기획은 선거 후에도 계속된다.》

“선거 쟁점이 없다. 유권자들이 탄핵 얘기 외에는 하지 않는다.”

선거 현장에서 만난 서울지역의 한 한나라당 초선 의원은 지난달 30일 “탄핵 시비를 대체할 다른 쟁점이 부상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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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탄핵이라는 ‘초특급 이슈’가 가진 발화성은 선거 주체인 정당-후보자-유권자 모두를 찬성과 반대, 우군과 적군의 이분법적 균열로 몰아넣고 있다.

실질적인 정책대안에 대한 논의를 압도하면서 상징과 가치에 대한 충돌로 선거판을 몰아간다는 점에서는 과거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처럼 탄핵이 선거 정국에서 유일무이한 쟁점이 되면서 민주주의의 앞날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민주정치의 공론장인 선거에서 단일 쟁점이 의제를 압도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민주주의의 미래를 낙관할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시민들의 촛불집회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는 3월 27일 밤에 막을 내렸다. 실정법에 대한 시비 속에 결국 자진해서 법을 지키는 쪽으로 간 것이다. 27일 밤 광화문 거리에서는 탄핵 찬성을 외치는 집회도 열렸지만 양측은 서로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마쳤다. 이는 한국 시민사회의 자제와 분별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진통을 겪으면서도 전진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민주화 이후 각종 선거 때마다 맹위를 떨쳐왔던 지역주의도 상당할 정도로 쇠퇴할 조짐이다.

YS와 DJ가 정치적으로 퇴장하고 JP의 영향력도 위축되면서 이전의 지역할거적인 선거 경쟁은 뚜렷이 약화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광주에서 만난 한 대학 교수(46)는 “탄핵 쟁점 때문에 지역주의가 더욱 희석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탄핵 정국이 아니었더라도 광주 쪽에서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현상은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고 전한다.

이번 총선을 겪으면서 경직됐던 이념적 스펙트럼과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공이 있지만 민주당에 잔류한 K의원은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보수가 되어 있더라”고 말한다. 이념적 분류기준이 그만큼 상대적이 됐다는 얘기다.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할 것이란 전망도 이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유연성과 이성적으로 변해가는 국민 정서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거대 야당이라는 위상에 안주하고 ‘차떼기 당’, ‘꼴통 보수’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 한나라당이 합리적 보수로 다시 태어나려는 환골탈태의 진통을 겪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총선을 통해 수십년 동안 억눌렸던 진보가 약진하고 그에 영향을 받아 건전한 보수도 바뀌어 정치가 일신하는 계기가 이루어진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둡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번 총선은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들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 헌법기관과 정치제도에 대한 시민의 불신, 시민사회와 정치권간의 원활치 못한 의사소통, 시민의 뜻과 참여 의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대의민주정치의 현실이 그것이다.

시민도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지나치게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부패한 국회의원 개인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법에 따라 재량권을 행사하는 국회의 존립 근거는 인정돼야 한다. 탄핵이라는 헌정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헌정질서는 유지되고 있으며 민주적 제도와 절차는 작동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학습의 계기이기도 하다. 헌법이 마련한 제도에 대한 이성적 평가와 판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결국 유권자의 선택이 민주주의의 진퇴를 결정한다. 유권자는 정당과 후보자의 선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어느 당과 후보가 국정을 책임질 수 있는지를 능동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선거 현장에서 내린 결론이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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