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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2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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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대통령비서실 직원 워크숍에서 언론의 비판과 견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언론관을 밝힌 데 이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행한 첫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이란 용어까지 구사해가며 한층 격한 어조로 비슷한 언론관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해 많은 학자들이 걱정하고 있다. 특히 이날 노 대통령의 언론관련발언에는 그동안 여러 신문들의 문제점 지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 청와대의 여론수렴채널에 구멍이 뚫린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이날 노 대통령의 언론 관련 발언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언론학자와 정치·사회학자들의 의견을 토대로 발언대목별로 들어본다.
▽“언론개혁과 관련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론과의 부당한 유착관계를 끊는 일이다”=학자들은 과거 정언(政言)유착은 언론이 원해서 이뤄졌다기보다는 정치권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했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최창섭(崔昌燮·언론학) 교수는 “정언유착 근절은 정치인들부터 우선 실천할 일이지 언론에 요구할 사항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김일영(金一榮·정치학) 교수는 “유착관계가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면 정부에서 내부적으로 지침을 세워 실천하면 되는 것”이라면서 노 대통령이 말없는 실천보다 이를 거친 언사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제 칼자루를 쥔 쪽은 대통령이므로 부당한 유착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본인이 장악하고 있는 방송사에 대한 영향력부터 끊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언론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므로 위험하다”=언론은 정치권력과 달리 투표로 뽑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가 구독하느냐 않느냐’, ‘시청자가 그 프로그램을 보느냐 마느냐’로 매일 국민으로부터 선택된다고 전문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언론에 대한 견제는 독자의 몫이란 것. 서강대 최 교수는 “그래서 판매부수가 중요한 것이고 ABC(발행부수공사)제도가 있는 것”이라면서 “신문의 퇴출 여부를 독자의 손에 맡기자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 왜 자꾸 정치논리로 개입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박성희(朴晟希·언론학) 교수는 “노 대통령이 과거 ‘우리도 잘할 테니 너희도 잘해 달라’고 의지를 밝힌 것은 좋았는데 요즘 들어 ‘언론권력’ ‘족벌’ 운운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희대 정진영(鄭璡永·정치학) 교수는 “과연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대통령이 돼라’고 당부하지만 이러한 언론환경에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회의하곤 한다”=학자들은 그동안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실패해 왔지만 그게 언론 때문이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희대 정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이 지나치게 권력을 남용해 언론이 이를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원하는 대로만 보도하면 정부가 잘 되는 게 아니라 잘못되기 쉽다는 것. 서강대 최 교수는 “올바른 대통령,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주변에서 더욱 견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김석준(金錫俊·행정학) 교수는 “현 정권이 생각이나 코드가 다르더라도 각 분야에서 전문성이 검증된 인재들을 국가적으로 활용하는지 여부가 대통령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학자들은 ‘타도’의 의식과 행태는 오히려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이란 반응을 보였다. 성숙한 사회라면 어느 한 쪽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 경희대 정 교수는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문제”라면서 “남은 강한 기준으로 보면서 자신은 유연하다고 생각하면 편향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강대 최 교수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언론의 비판이나 규탄, 방향 제시를 타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하도록 좀 더 격려해야지 이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언론관련 연설 요지▼
많은 사람들이 언론개혁을 얘기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오로지 언론과의 부당한 유착관계를 끊는 것뿐이다. 정부는 부당한 왜곡보도에 대해 원칙에 따라 대응해 나갈 것이다. 오보에 대해서는 정정·반론 보도 청구로 대응하고 경우에 따라 민·형사상의 책임도 물을 것이다.
정부 부처의 사무실 방문 취재를 제한한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취재 권리도 중요하지만 공무원들이 안정되게 일할 권리도 보호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제한하지는 않겠다. 취재를 위해 요청하면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공무원을 만날 수 있도록 하고, 반드시 공보관을 거쳐야 하거나 이를 일일이 신고해야 한다는 제한은 두지 않겠다.
언론은 또 하나의 권력이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위험하다. 더욱이 몇몇 언론사가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몇몇 족벌 언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끊임없이 박해했다.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끊임없이 받아 왔고 그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언론 환경 하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회의하고 있다.
▼한나라 반응▼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대해 “대통령의 확고한 파병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언론개혁 부분에 대해선 “노 대통령의 투쟁적 언론관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논평했다.
박희태(朴熺太) 대표권한대행은 “노 대통령은 파병 처리안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했다”고 평가했다. 박종희(朴鍾熙)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이라크전 파병 의지를 재확인하고 국민적 협조를 진솔하게 요청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피력한 언론관에 대해 “언론을 진보 보수로 구분하며 투쟁 대립 핍박의 관계로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은 국정연설 자리에는 걸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특히 “‘지금의 언론 환경에선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대목에선 비판신문을 고사시키거나 언론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무서운 음모가 번뜩였다”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언론을 권력이라고 지칭하면서 일부 방송문제는 쏙 빼고 소위 족벌언론만 겨냥한 대목이나 KBS 사장 선임과 관련한 대통령 개입문제는 변명으로만 일관한 것은 균형잡힌 시각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규택(李揆澤) 총무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언론에 대한 협박과 위협 수준이었다”며 “‘족벌언론’ 운운하는 것은 대통령이 사용해선 안될 용어로 용어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KBS 사장 인선에 대한 해명성 발언은 국정연설에 담을 내용이 아닌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등 언론관에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당 언론대책특위 이원창(李元昌) 위원도 “방송보도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안하면서 지나치게 신문에 적대감을 표출한 것은 사려깊지 못했다”고 평했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재계 반응▼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일 국회 연설에서 밝힌 경제정책의 뼈대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수준에서 기업의 구조개혁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제계는 재벌개혁 정책의 속도조절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대통령이 한국경제의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비쳤다.
▽단기 부양책 대신 장기 구조개혁=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현재의 경제상황을 “외환위기 시절보다 더 안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진단하면서도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최근의 경기침체가 주로 이라크전쟁과 북한 핵문제 등 외생적 변수에 의한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경제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켜 한미간 공조체제를 굳히고 북한 핵문제에 대한 세계 투자가의 불안감을 줄이는 ‘외교적 해법’으로 현 위기의 상당부분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보통의 기업이 성의 있게 노력하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시장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약속한 것은 기업활동과 경제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재벌개혁의 속도와 강도를 조절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언급하면서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구조개혁의 성과를 강조해 재벌개혁 정책 기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노사관계와 관련해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의 노사문화 정착’을 역설했지만 이를 위해 노사간의 신뢰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이 ‘경영 투명성’이라고 말해 사측의 책임성에 더 무게를 뒀다.
▽재계, “경제진단, 현실과 괴리 있다”=대통령이 국회에서 파병동의안 통과를 촉구한 것에 대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반길 만한 일”이라며 환영했다. A그룹의 관계자는 “명분이나 여론보다 실리를 택한 것”이라며 “최대의 수출시장이자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한국경제의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만큼 대통령의 결정은 다소 늦어지긴 했지만 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는 대통령의 경제관에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느끼는 경제에 대한 불안감은 아직까지 기업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의 수준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이는 외부변수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면서 현 정부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등 한국 경제 내부의 문제점은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소비와 투자의 회복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인 만큼 정부는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더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써야 한다”면서 “노사문제에서도 ‘대화와 타협’ 같은 불확실한 말보다는 ‘법치’를 강조해 기업들의 불안감을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밝힌 경제운용 방침
―단기부양책 쓰지 않아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조기도입
―기업회계제도 국제기준 맞게 개선
―기업지배구조 개선
―부당내부거래 지속적인 시정
―몰아치기 수사나 표적수사 안 해
―3년 간 계획 세워 시장개혁 추진
―시장에 드러난 위법 사실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
―대화와 타협의 노사문화 확립
―사교육비 문제 해결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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