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DJ의 착각과 고집

  • 입력 2003년 2월 9일 19시 07분


코멘트
“성군(聖君) 신드롬이 문제다.”

한 재벌 부인과 고관부인들이 얽힌 ‘옷로비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1999년 초여름.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언론의 의혹제기를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면서 강경대처했던 근본 원인을 바로 ‘성군 신드롬’으로 진단했다.

자신의 치적과 무오류에 대한 확신, 그로 인한 자기합리화의 함정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리더십…. 이런 요소들이 겹쳐 민심의 소재를 제대로 읽지 못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을 자초한 점을 꼬집은 말이다.

최근 현대상선의 대북 비밀송금 사건을 둘러싼 DJ와 청와대의 대응방식도 99년 상황과 너무나 닮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2235억원+α’의 거금이 국가정보원 루트를 타고 북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이 ‘실체적 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DJ와 청와대는 최소한의 고백성사마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측의 한 핵심관계자도 “진상해명을 하라는 뜻을 여러 차례 청와대측에 전달했지만 함흥차사”라며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는 오기가 발동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DJ의 딱한 처지는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다. 98년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한 이후 일련의 대북거래를 철저하게 ‘밀실주의’ 방식으로 추진해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때는 독식 의식이 한층 두드러졌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최근 “당시 대북문제에 관해 조언을 해줄 만한 전문가에게 ‘청와대측에서 의견을 구하더냐’고 물었더니 ‘전혀 없었다’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고 밝힐 정도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북 지원자금이 ‘평화 비용’이라는 현 정부의 해명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점이다.

지난해 3월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래리 닉시 연구원이 의회에 제출했다는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이 보고서는 “미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현대로부터 98년부터 금강산 관광사업 대가 4억달러와 비밀리에 ‘웃돈’ 4억달러를 받아 이중 절반을 무기구입에 전용한 것으로 보고 2001년 1월 경고 메모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도 “마카오로 송금된 현대자금 중 일부가 직접 무기구입비로 사용됐다는 정보를 미국측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DJ측이 몰랐다면 이상하다. 우리는 ‘평화’를 사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북한은 우리의 ‘성의’를 묵살한 셈이다.

한국의 지원을 별반 고마워하지 않는 듯한 북한측 분위기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실제로 중국 베이징 등에서 한국측 인사들과 접촉하는 북한 관리들의 입에서는 “노벨평화상은 혼자 받고…”란 불만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심지어 지난해 4월 남북관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방북했던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DJ가 ‘베를린 선언’(2000년 3월)에서 모든 것을 다 지원할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정상회담도 했던 것인데, 제대로 지원을 안 한다”는 힐난까지 들었다는 후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진상을 공개하지 못하겠다’는 DJ의 고집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사태수습의 첫 단추는 결국 사실에 입각한 고백성사일 수밖에 없다. 오기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쌓이고 쌓인 국민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기 위해 특검제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내몬 책임도 DJ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dk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