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이리에 아키라/´테러와의 전쟁´그늘도 봤으면

  • 입력 2002년 2월 27일 18시 40분


원래 학문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쓰거나 말하는 것이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나라 또는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정치적 또는 기회주의적인 발언이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읽는 사람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 똑같이 받아들인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동아일보에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내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다.

▼무고한 사람 희생 외면▼

원고 집필을 앞두고 있을 즈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중국 일본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한중일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설이 시도됐으며 그 중에서도 지난해 9월 11일 동시테러사건 이후의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졌다. 즉 미국주도형의 국제정세에 동아시아 각국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특히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미국에 대해 한중일은 어디까지 보조를 맞춰나갈 것인가 등의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눈앞의 문제에만 관심이 쏠려 그 이외의 것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미국과 동아시아의 관계는 9·11테러사건 이전이나 이후나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졌다고 볼 수 없다. 국제관계를 이루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요소는 오랫동안 존재해온 것이며, 그러한 요소들을 장기적인 시야에서 보지 않으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기 쉽다.

장기적인 시야란 무엇인가. 최근 감명을 받은 두 가지 연설을 예로 들고 싶다. 작년말 스웨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회의에는 과거에 평화상을 수상한 개인이나 단체의 대표가 30명 정도 참가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었다. 회의 모두에 김 대통령이 행한 연설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20세기를 통해 약 250번의 전쟁이 일어났고 1억명이상의 사망자를 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60%는 비전투자였다는 것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필사적으로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앞으로의 세계는 글로벌화를 촉진함과 함께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테러리즘을 말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위해서는 인류 모두가 정보기술의 혜택을 받고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원칙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자연환경을 보호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명간 인종간 종교간에 대화와 협조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김대통령 연설의 요지였다.

이 심포지엄 직후 200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행한 연설도 김 대통령의 연설과 아주 비슷했다. 아난 총장도 유엔의 사명은 “한사람 한사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확인하고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발전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를 위해서는 각국이 협력해 법치주의를 강화하고 빈곤을 없애고 야만적인 행위를 경계하며 자연을 보호하고 남녀간 평등을 존중하고 장래의 자손을 위한 안전한 세계를 만들어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도, 아난 사무총장도 현실세계가 장래를 향해 걸어나가야 할 길을 이상적인 말로 호소하려고 한 것이다. 9·11사건 이후의 현실이 너무나도 살벌한 만큼 그러한 이상을 거론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1840년대 미국을 방문한 영국의 소설가 디킨스는 귀국후 발표한 ‘미국기행’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너무나도 ‘현실’에 집착하고 있으며 좀 더 ‘이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그가 문제시한 ‘현실’은 노예제도로, 그러한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해 왜 좀 더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인류의 미래에 눈돌려야▼

원래부터 미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디킨스의 방미후 몇 년 지나자 반노예운동이 대단한 기세로 벌어졌다. 대외관계에서도 민족해방이라든지 민주주의라든지 인권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 미국정부도, 여론도 많은 이상을 내걸어왔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 9·11사건 이후 테러리즘 박멸이라는 현실의 문제에 집중해 테러의 근원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김 대통령이나 아난 총장이 지적한 것 같은 문제에는 관심을 돌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번 동아시아 방문을 통해 부시 대통령도, 각국 지도자도 현실만을 보지 말고 앞으로의 세계의 미래상에 대해 대화를 나눴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회담을 몇 번 반복해도 미국도 아시아도 국제사회의 행방에 대해 아무런 명확한 지침을 보여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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