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햇볕 지지' 만병통치약 아니다…겉다르고 속다른 北관련 발

  • 입력 2002년 2월 15일 19시 04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 한미 외교당국자들의 입에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외교적 수사(修辭)가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왔다.

미 당국자들은 대북 강경 발언을 계속하면서도 ‘햇볕정책 지지’를 상투어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북-미 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조성한 강경 발언이 나온 직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전제조건 없는 대화’란 유화발언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외교적 수사들을 평면적으로 이해하면 혼란과 오해만 가중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동안 오고간 외교적 수사의 안에 담긴 ‘속뜻’을 풀어본다.

▽“부시 행정부는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한미 간 대북공조의 난맥상이 노출될 때마다 청와대나 정부 고위당국자들이 ‘만병통치약’처럼 내세우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햇볕정책 지지〓한미간 대북공조 이상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말을 쓰지만 상당한 온도차가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클린턴 전 행정부는 자신들의 대북정책과 햇볕정책의 상호보완적인 발전을 위해 실천적으로 노력한 반면 부시 행정부는 ‘햇볕정책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정도”라고 지적했다.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도 “미국 입장에서는 햇볕정책이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의 안전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 반대할 이유도 없고, 앞으로도 지지한다고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햇볕정책 지지’를 무조건적인 지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제 조건 없이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 발언 이후에도 지난해 6월에 밝힌 이 원칙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클린턴 전 행정부 때와는 180도 함의가 다르다”고 말한다.

클린턴 전 행정부는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오는 것 자체를 일종의 ‘평화 제스처’로 보고, 상응한 ‘당근’을 주겠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부시 행정부는 미국이 주도권을 갖는 북-미 대화를 하겠다는 의미라는 것.

고든 플레이크 맨스필드 태평양문제연구소 소장은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대화에 응하려면 하고, 하고 싫으면 그만 두라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공은 북한에 넘어가 있다” “아니다. 미국에 있다”〓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5일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북미)대화의 공은 북한의 코트에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박길연(朴吉淵)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는 7일 “북한과 미국 간의 대화 또는 적대 관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 있다”고 반박했다.

이 공방의 바탕에는 클린턴 시절의 우호적 분위기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고싶어 하는 북한의 기대가 깔려 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이후 대외관계에 관해 ‘과거 불문’의 입장을 공식선언해 북한의 기대는 물거품이 된 셈이다.

▽“한미 간에는 대북정책에 관해 이견(disagreement)은 없으나 시각차(difference)는 있다”〓워싱턴의 고위 외교소식통이 최근 한미관계를 설명한 말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지금 이런 사실을 깨닫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꼬집고 있다.

외교안보연구원 김성한(金聖翰) 교수는 “한반도 문제는 남북간의 문제와 국제적인 문제가 혼재돼 있다”며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대북 강경 발언을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보지 말고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반테러 세계전략이란 큰 틀 안에 있는 반면 우리의 햇볕정책은 ‘남북화해협력 증진을 통한 신뢰구축’이 목표여서 논의의 차원 자체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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