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임수경 격정토로 ①

  • 입력 2000년 12월 22일 16시 42분


-일본 갔다온 얘기부터 들려주시죠.

“11월22일에 가서 12일 정도 머물다가 돌아왔어요. 공식적인 행사는 두 개였어요. 하나는 일본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학술회의였고, 하나는 일본국제사면위원회 강연회였어요. 두 행사 다 도쿄에서 열렸어요. 학술회의에서는 기조발표를 했는데, 제목은 ‘동아시아 냉전 구조와 테러리즘’이었어요. 국제사면위원회는 (방북사건 당시) 저를 ‘세계 양심수’로 지정해 꾸준히 석방운동을 했던 단체예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강연을 했죠. 아사히신문에 강연회와 관련해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이 왔더군요. 11월23일 학술회의에 참석한 후 오사카에 갔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와 12월2일 국제사면위원회에서 강연회를 갖고 다음날 귀국했어요.”

애초 임씨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마음이 바뀌었다.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녀의 생각을 흔들었을까.

“일본에서 미국으로 곧장 건너갈 생각이었죠. 가서 남은 학업(임씨는 코넬대 대학원에 등록한 상태다)을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개인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어요. 일본에 가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일본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뿌리 깊은 민족적 차별이 여전한 것을 보고 굉장히 가슴 아프더라고요. 분단 문제만 하더라도 그들이 분단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국적을 선택하는 어려움 못지 않게 총련이나 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대한 설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고, 그래서 더더욱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은 열망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일동포가 60만 명인데, 오사카에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우리 동포라고 할 정도로 동포들이 밀집해 있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에서 임수경 석방 탄원에 서명한 사람이 83만 명이었어요. 총련이 78만 명을 끌어냈고, 다른 조직에서 별도로 5만 명을 받았다고 해요. 한국 대사관에 접수하려 했는데 안 받아줘서 UN인권위원회에 보냈대요. 10년 전 일인데도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셨는데, 제가 일본에 처음 가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죠. 통일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절실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로

재일동포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확인하면서 임씨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통일운동에 대한 신념을 새삼 다진 듯싶다.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우리는 통일의 기운을 크게 느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일본 동포사회에선 정상회담 이후 총련과 민단 사이에 벽이 많이 무너지고 있어요. 공동 행사도 많이 열리고, 통일 기운이 속구치는 걸 느꼈어요.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저에 대한 기대감을 느끼며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에서도 동포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문제인데, 밖에 살면서 분단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과 통일된 나라를 조국으로 두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그들이 거기서 뿌리내리는 힘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통일의 주체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일문화재단 만들겠다

그런데 지금 통일운동엔 구심점이 없어요. 통일 문제를 정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물론 설사 이용이 되더라도 통일이 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통일연구소 같은 통일 관련 단체는 많지만 통일의 기운을 일으키는 실질적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요.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있지요. 과거의 통일운동 양상도 비슷하고.

일본 강연회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어요. 물론 여러 가지 답안이 있겠지만 정말 우려되는 것은 남과 북의 민중들 사이에 놓여 있는 불신의 장벽, 마음의 장벽이에요. 그것을 허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정상들이 왔다갔다 하는 일과 제도적인 정비도 필요하겠지만, 정말 우리가 북한의 민중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또 북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에 얼마나 동화될 수 있을지, 통일 이후에 갖는 후유증이란 바로 그런 것이거든요.

저는 해외동포들을 하나의 주체로 세우면서 정말로 커다란 통일문화 캠페인을 벌일 생각이에요. ‘이 시대에 통일의 주역으로 힘있게 일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라고 물을 때, 저의 잠재력 같은 것을 일본에서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사실은 그동안 제 입지나 의지가 약했어요. 석방된 후 학생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틈틈이 단체 활동을 했지만 제가 스스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같아요. 결혼하면서 자신을 한계지었던 점도 있고. 일본에서 동포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내가 스스로 주체가 돼서 뭔가 해야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어요.

과거에 나를 옭아맸던 외부조건들, 예를 들어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보안관찰 대상이었고, 사면복권도 안됐고, 최근에는 이혼과 아이 문제로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굴레가 거의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힘있게 추진할 때가 됐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비록 지난 10년 간 특정 조직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통일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변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이제는 저도 제 이름을 걸고 제게 맞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테면 ‘통일21 캠페인’ 같은 것인데, 통일문화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선언적인 의미의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아니라 비정치적 교류를 계속해 국가보안법이 일상 생활에서 유명무실해지도록 만드는 일 같은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반면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특별법이 있잖아요. 선언적 통일운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북과 남에 도움이 되는 통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불씨가 얼마나 크고 밝은 횃불로 빛날 수 있을지, 그들이 그런 희망을 저에게서 보고 있다면 저는 또 그들을 통해 희망을 봤거든요.”

이런 결심을 하기 전까지 그녀가 최근까지 가장 마음을 뺏긴 일은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과 다섯 살 난 아기를 둘러싼 전남편과의 양육권소송이다. 운동권이던 그녀의 오빠는 연세대 3학년 재학중인 1984년에 입대,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했는데 7개월 만에 죽었다. 군 당국은 사인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오빠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습니까.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조사대상으로 결정됐어요. 관련자 몇 명을 조사한 걸로 알고 있어요.”

블루스와 해방춤의 차이

―양육권소송은요?

“다 끝났어요. 386사건(386 광주술판사건) 때도 느낀 것이지만, 누군가의 공격을 계속 피할 거냐, 아니면 침묵할 거냐를 생각할 때 내가 그것을 피할 이유가 없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서 내 몫을 잘하고 싶다, 그렇게 뒤늦게라도 마음먹은 것이 잘했다 싶어요.”

임씨는 미국 유학중이던 지난해 이혼했다. 그리고 올해엔 양육권소송을 벌였다. 2심까지 이어진 재판 결과 그녀가 아이의 양육을 맡기로 했다. 이혼 얘기는 나중에 다시 듣기로 하고 ‘386 광주술판사건’으로 넘어갔다.

―광주 사건은 임수경씨 뜻과 상관없이 그 여파가 커진 것 같습니다. 5·18 전야제 사회는 어떻게 맡게 된 거예요?

“미국에 있을 때 연락이 왔어요. 사실 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오는 형편이었는데 그쪽에서 비행기표를 대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왔죠.”

―일시 귀국이네요?

“그렇죠. 미국에서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소송 때문에) 아기가 출국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행사가 끝난 후에도) 못 돌아간 거예요. 한 학기를 미루면 그 안에 판결이 나겠다 싶었는데, 2심까지 가는 바람에 출국날짜가 늦춰졌죠.”

―소송이 진행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렇죠. 전야제가 5월17일인데 그 날 첫 재판이 있었어요. 동시에 진행된 거예요, 386사건과 양육권소송이. 묘하게 그렇게 돼버렸어요. 아기 양육권과 여권 문제가 다 해결된 게 10월말이에요. 11월에 나갈 예정이었는데 일본을 다녀와 생각을 고쳐먹은 거죠.”

‘386 광주술판사건’은 우리 사회가 그녀의 이름에 어떤 상징성을 부여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그녀에게 불행인지 축복인지 몰라도, 여전히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을 그 자신에게, 또한 대중에게 새삼 일깨워 준 사건이기도 하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의 진실을 궁금해합니다.

“저는 사건의 진실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건의 결과와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한 거지. 당사자가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고 용서도 있는 건데, 그들은 너무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어요. 공인으로서 대중에 대한 책임이 있고,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라면, 더구나 그들이 겨냥한 대상이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될 저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용서가 안 되는 거죠.”

―임수경씨의 글과 관련자들의 주장이 몇 가지 어긋나는 게 있습니다. 박노해씨가 여종업원과 춤을 췄다는 부분만 해도 말이 다르지요?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아가씨와 블루스 추면 안 돼요?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쪽에선 해방춤을 췄다고 해명했지요?

“매체마다 사람마다 얘기가 달라요. 박노해씨는 자기는 춤춘 일이 없다고, 사건 직후 중앙일보에 그렇게 말했더라고요. 그런데 김성호 의원은 박씨가 해방춤을 췄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김태홍 의원은 ‘박노해가 무슨 춤을 추냐’, 이런 식이에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상반된 진술이 있다 쳐요. 사건 현장에 없던 사람은 누구의 얘기가 맞는지 판단할 수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느냐. 정황에 의해서 판단해야죠.

이 사람이 A를 주장하는데 다른 사람은 A가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A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정황근거와 반대로 A가 아니라고 할 만한 정황 근거가 각각 있겠죠. 그들은 여자를 끼고 술을 먹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그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반면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술 먹었다, 라고 없는 사실을 꾸밀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은 임수경 얘기는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내가 헛것을 본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나온다는 거죠. 그러면 나한테 그 이유를 달라는 거예요.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1000%의 허무맹랑한 얘기를 했는지. 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지.”

―술자리에 있던 사람이 한 10명 됐나요?

“10명 넘었을 거예요.”

―여종업원이 한 사람 앞에 한 명씩 앉은 건 아니죠?

“그건 아니고, 꽤 있었죠. 앉아 있고 서 있고 서빙하고. 나는 숫자가 몇 명인지 다 알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네가 밝힌 게 4명이거든요. 나는 기자회견에서 4명까지는 인정해줬어요.”

“내가 헛것을 봤나”

임씨는 당시 관련자들이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며 분개했다. 특히 L의원의 ‘오리발’에 대해선 혀를 찼다.

“얼마 전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발족식 행사 때 L의원을 만났어요. 느닷없이 나보고 ‘임수경씨가 (그 방에서) 나갈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래요. 누가 물어봤냐고요. 내가 너무 기가 막혀 ‘의원님 왜 그러세요, 정말. 의원님하고 나하고 그 날 다른 방에서 따로 얘기까지 했잖아요?’ 하고 정색을 했더니 ‘아 그래요? 그럼 내가 술이 취해 임수경씨를 못 봤다고 생각했나봐’ 그러더라고요.

그 사건으로 기자회견할 때 어떤 기자가 ‘그 자리에서 L의원 보셨습니까. L의원은 임수경씨를 못 봤다는데요?’ 하고 묻기에 제가 ‘봤다’고 대답했거든요. L의원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그게 귀에 들어갔겠죠. 그 날 행사장에서 또 그런 말을 하니까 제가 순간적으로 화가 났죠. 그래서 ‘술이 취해서 그 사람을 봤는지 못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얘기를 해야지, 왜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느냐’고 따졌어요.”

L의원의 오리발

임씨는 ‘말’지 7월호 기사에 대해 분개했다. ‘말’지 기사는 당시 관련자들 개별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 것인데 그에 따르면 임씨는 헛것을 봤거나 사실을 왜곡 또는 과장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회견을 끝으로 양측 모두 더 이상의 인터뷰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그 후 ‘말’지에 아예 민주당 편들기로 관련자들의 인터뷰를 포함한 기획 기사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날 그런 술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쪽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다만 정도의 차이라는 거지요. 자기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 내용과 달리 여자들하고 흐느적거린 게 아니다, 또 여자들은 술과 안주를 차리느라 왔다갔다 했을 뿐이다, 뭐 그런 해명 아닌가요. 그런데 기본적인 사실도 잡아떼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죠.”

―우상호씨(민주당 서대문구지구당위원장)는 다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인정한 사람들만 이상해졌죠. 다른 사람들은 다 잡아떼고. 여자도 없었다, 춤도 안 췄다…. 그런데 영길이 형(송영길 의원)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을―킬리만자로를 불렀는지 뭘 불렀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자기가 그걸 불렀다고 말하니 알게 됐지―그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어요. 결국 영길이 형만 바보 된 거예요. ‘노래는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자 끼고 술 먹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인데 차라리 그 정도면 나아요. 상호 형도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어쨌습니다’ 하면서 기자회견 때 울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지탄받고, 딱 잡아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돼버리데요.”

―김민석 의원도 잡아뗀 편입니까.

“자기는 원래 여자를 옆에 앉히지 않는대요.”

―임수경씨 글에는 양옆에 여자를 앉힌 걸로 돼 있던가요?

“웃기는 것은 서로 자기 옆에 김의원이 앉아 있었대요.”

‘말’지 기사 중 김민석 의원과 관련한 부분을 살펴보자. 김성호 의원은 “확실한 것은 내 옆에 김민석 의원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장성민 의원은 “김민석 의원 부분은 1000% 거짓말”이라며 “임수경씨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김민석 의원은 나하고 얘기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상호씨의 증언에도 김의원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여종업원이 들어온 것은 맞다. 사람들이 김의원 옆에 여종업원을 앉히려고 했지만 김의원은 ‘화장실 간다’며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는 보조의자에 앉았다.”

임씨가 문제의 글을 386정치모임인 ‘제3의 힘’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것은 술판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그러나 이 글은 파장을 우려한 ‘제3의 힘’ 총무 이정우 변호사에 의해 몇 시간 만에 삭제됐다. 삭제되기 전까지 조회수는 47. 이 47명의 조회자 중 누군가에 의해 임씨의 글은 일부 표현이 바뀐 채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다.

―글을 올린 데는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동기라기보다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죠. 계속 가슴에 담고 있다가 그 사람들이 5·18 기념식에 참석하고 광주를 계승하네 어쩌네 하면서 인터넷에 인터뷰도 하는 걸 보고 한마디로 웃긴다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일 때문에 지금도 많이 아프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런 뜻에서 선배들의 조언을 바랐던 거예요.”

―임수경씨가 쓴 글과 인터넷에 돌아다닌 글이 조금 다르지요?

“문제가 된 글은 누가 쓴 건지 제가 알아요. 그런데 그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그거예요. 제가 쓴 글이 있었고, 누가 그 글을 정말 화려하게 변조해 유포시켰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 글을 쓴 네가 잘못이다. 뭐 그런 스토리인데 그 글은 별도로 작성된 거예요.”

원문과 이를 도용한 글은 사실 내용 면에선 별차이가 없다. 임씨도 이를 인정했다. 다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다 언론사에 포착된 글에는 원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임씨와 우상호씨 간의 언쟁 부분이 빠져 있다. 그리고 원문에는 없는 ‘흐느적거렸다’ 따위의 자극적인 표현 몇 가지가 첨가돼 있다.

―인터넷에 글을 유포시킨 사람은 ‘제3의 힘’ 회원인가요?

“아니에요. 누군가 저한테 확인을 해오더라고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광주에서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였어요. ‘제3의 힘’ 총무인 이정우 변호사가 그 글을 보고 전화를 걸어왔어요. ‘임수경씨 마음 알 것 같다. 나도 글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 내가 얘들을 붙잡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하겠다. 그런데 이게 혹시라도 언론에 보도되면 문제가 커지니까 삭제를 하는 게 좋겠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삭제에 동의했어요. 뭐가 문제죠?”

―원문을 보면 그날 임수경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우상호씨에 대한 개인 감정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이를 두고 사적인 감정이 공적 분노로 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요.

“개인 감정을 폭로하려 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상호 형을 염두에 두고 썼던 것이기 때문에 개인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공적 분노가 그런 것 아닙니까. 개인적인 체험에서 촉발돼 공적인 것이 되지 않나요. 저도 이런 일들을 당했다는 사실을 덮어두고 가고 싶을 만큼의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훨씬 더 큰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람이라고요. 내가 길거리에서 불량배한테 그런 식으로 당했다면 밝힐 이유가 없어요. 밝혀서 뭘 해요, 내가 깎이는 일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선배들로 생각했기 때문에 글을 올린 거예요.”

―그런 뜻이라면 굳이 공적인 공간에 글을 올릴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사적인 통로로 푸는 게 합리적 해결 수순 아니었을까요.

“문제는 우상호씨를 비롯한 그 사람들이 적절하지 못한 시간에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있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내가 그 일을 알리면서 상호 형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빼놓으면 그건 내 얘기가 아니잖아요?”

임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태가 악화된 데는 자존심 문제도 있는 듯싶다. 글을 올리게 된 경위야 어떻든 임씨는 5·18 전야에 여종업원이 접대하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생운동을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그런 날 그런 자리에서 술 먹고 노래 부른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봤다. 따라서 그녀는 ‘386선배들’이 마땅히 그 날 일을 반성하고 사과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그 일에 소홀했고 그것이 그녀의 분노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은 그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K의원의 폭탄주 로비

―운동이라는 것이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특히 국회의원들에게는 사람이 곧 표잖아요.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는 상호 형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오히려 상호 형이 최대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현역 의원이 아니잖아요.”

―공적인 차원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임수경씨 개인 차원에서 볼 때는 어쨌든 분노를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나중에 반성했어요. 현역 의원들처럼 나중에 나를 매도하지는 않았죠.”

―우상호씨와의 화해 여부와 상관없이 공적인 차원에서 그 일을 문제삼아야겠다고 판단한 겁니까.

“그럼요. 만약 문제 제기 방식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면, 좋다 이거예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후의 대응방식이에요. 과연 그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갖고 사태를 마무리지었는가. 김민석 의원의 정치적 플랜, 마스터 플랜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는 걸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나도 미래가 많이 무너졌어요. 나는 정말 억울해요. 내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 제기 방식을 탓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정말로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못한 사람들과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의 잘못이죠. 어쨌거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실성 인간성 도덕성이 어떤지, 체험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큰 교훈을 얻었어요.”

―결과를 놓고 보면 그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깨끗하고 정정당당하게 나갔다면 이용당할 이유가 없었겠죠. 어쨌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우리 그 날 여자들 있는 데서 술 마셨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정말 미안하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그런 말 할 자격 있나’라고 되물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반성할 만큼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부분을 지적해준 사람에게 고맙다, 앞으로 잘하겠다, 지켜봐달라’, 그랬다면 왜 정치적으로 이용당해요. 안 그래요?”

―당시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마디로 황당했죠. C일보가 처음 이 일을 알았어요. C일보 담당 기자한테 어떤 크기로 쓸 거냐고 물어보니 사회면 박스 정도라고 했어요. 저도 딱 그 정도의 사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그 신문엔 기사가 실리지 않았어요. 그날 밤 K의원이 C일보 편집국에 찾아가 기자들에게 폭탄주를 한잔씩 돌렸대요. J의원도 전화로 로비를 했다고 들었어요.”

장원사건과 다르다

임씨는 C일보가 그 날 기사화하지 않은 데는 두 의원의 로비가 영향을 끼쳤다고 믿고 있다. 사건 직후 주간 ‘미디어 오늘’(6월8일자)은 임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기사에도 폭탄주 얘기는 없다.

―K의원의 폭탄주 얘기는 누구한테 확인한 겁니까.

“C일보 기자한테 들은 거예요. 시내판 마감이 11시인데, 11시5분 전 나한테 전화했을 때 ‘기사가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새벽 1시반쯤 내가 기사가 실렸는지 확인했더니 안 실린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K의원이 찾아와서 폭탄주 한 잔씩 먹고 금방 헤어졌다는 거예요. C일보에 기사가 빠진 그 다음날 동아일보가 1면에 크게 쓰고 사회면 톱으로 키우면서 다른 신문들도 키웠지요. 민주당에서는 이를 언론과의 불편한 관계 탓으로 돌리던데, 그 점은 참 안타깝죠. 어쨌든 언론 보도의 문제점까지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도덕적 비난이야 그렇다 치고, 그들이 우리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애써온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건이 터지면 늘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어요. 예컨대 장원씨 성추행 사건이 터졌을 때 정치권과 보수 언론에서 시민운동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고 매도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빌미를 준 것이지요. 비판을 하되 구분할 것은 구분해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장원씨 사건과 이 사건은 달라요. 그 사건은 당사자가 잘못을 시인했고, 그에 대한 법적 처벌도 받았어요. 그런데 이 사건은 당사자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잘못된 진술이나 판단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그런 식으로 정리됐어요. 개혁세력? 좋아요. 그런데 개혁세력이라면 뭔가 달라야 한다는 거죠. 기성 정치인이 잘못 했다면 덮어주고 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적어도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개혁세력이라면 ‘그래. 그런 일 있었다. 반성한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다음 ‘하지만 우리에게 너무 돌을 던지지 말아라’ 할 수 있는 거죠.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자회견도 했던 거고. 그들을 감싸주고 덮어주려고. 건전한 비판, 건전한 해결방식을 통해 건강한 미래가 열리는 것 아닌가요. 아름답게 끝낼 수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들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을 매도했어요. 지금까지 많은 진실들이 이런 식으로 덮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이 사람들이 딱 잡아떼고 아니라고 한다면, 한 사람의 인생과 인권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임씨는 “인간성 확인 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 이상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는 말로 386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실망하긴 했지만 그 사건만으로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재단할 수는 없다고 봐요. 과거 그들이 보여준 희생 정신이 다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는 거죠. 미래에는 좀더 잘할 수도 있겠죠. 정치인으로서 잘한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감화를 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지요. 나야 개인적 차원에서 그들에게 희망을 버렸지만, 그래도 지나온 삶이 있는만큼 개인적인 영달이나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정치인과는 분명히 다르리라고 봐요.”

<조성식 신동아기자>mairso2@donga.com

신동아 인터뷰 전문보기
[신동아]임수경 격정토로 ②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