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교수 “출신배경 다른 사할린 한인들 김치로 통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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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아사쿠라 교수, 26일 유네스코 심포지엄서 논문 발표
일제강점기에 끌려온 ‘화태치’…
중앙亞서 돌아온 ‘큰땅뱅이’… 북한서 온 근로자 ‘북선치’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녔고 심지어 말도 잘 안 통하는 사할린 한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김치였다.”

아사쿠라 도시오(朝倉敏夫·63·사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교수가 러시아 사할린 지방의 한인사회 음식문화를 연구한 논문 ‘사할린의 김치에 대한 고찰’에서 김치가 이 지역 한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나아가 이들을 한민족으로 융합하게 만드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아사쿠라 교수는 이런 내용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26일 열리는 유네스코 무형유산자문기구 국제심포지엄 ‘김치와 김장문화’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논문에 따르면 사할린 지방 전체 한인동포는 약 3만 명으로, 그 구성이 매우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 끌려와 이 땅에 뿌리내린 ‘화태치’(약 60%)가 가장 많고, 옛 소련 스탈린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돌아온 ‘큰땅뱅이’와 북한에서 벌목장이나 광산에 일하러 왔다 눌러앉은 ‘북선치’가 나머지를 이룬다. 여기에 일부 남한과 북한 국적 거주자, 중국 조선족까지 일부 뒤섞여 있다.

아사쿠라 교수가 보기에 이곳 한인들은 생김새 외엔 공통점이 많지 않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과 한반도에서 몇 대를 거치면서 각기 다른 생활방식을 형성한 탓이다. 하지만 음식문화만큼은 같은 핏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식탁에 김치를 빼놓지 않고, 함께 김장을 담그며, 나물을 즐기는 전통은 같은 틀로 찍어낸 듯 닮았다.

재밌는 것은 사할린 김치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여러 지역 문화가 함께 버무려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일제 패망 직후 이 지역 김치는 러시아식 샐러드에 가까웠다. 양배추를 주재료로 양념을 약하게 해 맛이 밍밍했다. 경상도 출신이 많아 김장에 생선을 넣는 풍습은 이어졌는데 현지에서 조달하기 쉬운 연어를 많이 썼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엔 북한 사람이 대거 유입되며 북한식 백김치를 많이 담갔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는 한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고춧가루도 듬뿍 넣고 소도 제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현재 사할린 한인 가정에서 50% 이상이 김치냉장고를 쓰는 것도 한국에서 전파된 유행이다. 한국에서 들여오는 고춧가루나 양념은 현지에서 최상품으로 치지만 고가여서 중국산을 많이 이용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식 김치가 현재 사할린 시장에서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음식으로 대접받는다는 점이다. 과거 ‘마늘냄새 난다’며 인종 비하의 대상이 됐던 김치가 이제는 러시아인들의 선호식품으로 바뀌었다. 아사쿠라 교수는 “한국의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한류문화가 확산되면서 김치나 나물이 수준 높은 고급 요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화적 변화는 사할린 동포들에게 자긍심으로 이어졌다. 아사쿠라 교수의 인터뷰에 응한 많은 한인들은 출신과 상관없이 김치를 ‘민족의 피’라며 자랑스러워했다. A 씨는 “이름도 바뀌고 한글도 잊었지만 김치 맛은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과거 김치라면 눈살을 찌푸리던 러시아인들이 김장을 배우려 하는 걸 보면 매우 뿌듯하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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